:네번째 편지- 빈 집에 날아온 꽃씨
# 네번째 편지: 빈 집에 날아온 꽃씨에게
아이야,
아직 내가 소년도 소녀도 아니었을 무렵, 나는 내 안에 빈 집을 하나 소롯이 지었어.
내가 소년이 되었다가, 소녀가 되었다가, 여자가 되었다가, 마침내 엄마가 되었을 때, 빈 집 가득 꽃향기 채우며 노오란 봄꽃이 망울망울 터져 올랐어.
그렇게, 네가 태어났어.
엄마는 집을 짓는다.
어쩌다 보니 태어난 곳의 반대쪽 땅에서, 집도 짓고 밥도 짓고 심지어 꼬맹이도 키우며 살지.
한창 때엔 성공한 건축가로 폼나게 이름을 알리고 싶은 치기도, 거친 공사판에서 남자들에게, 백인들에게 지기 싫은 오기도 있었던 것 같은데.... 뭐 지금은 십여 년간 여태 버티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할 뿐이야. 엄마 왔다~! 하고 전속력으로 달려와 매미처럼 매달린 꼬맹이와 늘 합체되어 사는 게 영 무겁긴 하다만, 오늘도 엄마는 맴맴 열심히 달려.
엄마가 만드는 공간의 이야기를 해줄게. 지루하지만 한번 들어봐. 공간과 공간감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거야.
직선, 곡선이 만나 매끈한 경계를 이루고 질감, 양감으로 안팎을 야무지게 다진 한 공간은 그 위에 우리의 시선과 이야기, 즉 마음이 얹힐 때야 비로소 이 세계에 태어난단다.
이름을 불러줘야 꽃이 되는 우리처럼.
어떤 시인은 시적인 것은 시가 아니라고 했지.
그처럼 공간감도 엄밀히는 공간이 아니지만, 나는 늘 공간감, 공간의 감(感)을 짓는 사람이길 바라 왔어. 공간이 공간이 되기 위해 고이는 마음, 공간의 상, 냄새, 안개, 기운, 온도, 꿈.... 그런 것들이 환기하는 시(時)와 시(詩)를 가만히 읽어주는 사람이길.
그런 공간의 마음은 사물과 우리의 관계 속에 안개 같은 느낌으로만 존재하면서 부유하다가 우리가 인식할 때야 비로소 이 세상에 태어나. 지붕은 보이며, 마루는 디뎌지며, 벽은 만져지며 우리에게 말을 걸어.
순간, 차가운 물리적 공간 위에 하나의 시가 포개지며 우주적인 시공간(space-time continuum)이 열리지. 그 독특한 발화의 순간을 각자의 기억의 서랍에 간직하며 우리는 한 발짝, 한 시간 나아가는 거야.
집을 짓는다는 건, 그렇게 켜켜이 쌓여갈 우리의 삶을 위해 터를 다지는 것 같아.
그리고 그 빈 터에 나무를 하나 심는 것. 돌아오거나 떠나가거나 때론 담고 가는 나만의 아스라한 우주를 끌어안아주는 것. 그러면 계속 이어지는 우리의 이야기가 또다시 우리 영혼의 집이 되는 거야.
있잖아, 네가 오고, 엄마의 집은 다시 예뻐졌어.
엄마가 아직 여인이고 소녀이고 소년이고 엄마 엄마의 봄꽃이었을 때 품고 있었던 어떤 집에 대한 기억을 들려줄게.
이 글은 그 집에 찾아와 준, 그 집을 다시 찾아준 너에게 들려주는 나의 고백 같은 거야. 엄마가 너였을 때, 벽과 마루와 지붕이 어떤 말을 속삭였는지, 그 위에 엄마는 어떤 시를 포개었는지 얘기해줄게. 그렇게 중첩된 시간의 층이 쌓인 터에 엄마는 너와 함께 어떤 집을 짓고 싶은지 그려볼까.
엄마의 엄마가 엄마한테,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우리에게 지어준 집.
또르르- 투명한 구슬같이 웃는 내 아가에게 주고 싶은 집을 햇살로 예쁘게 지어, 꽃이라고 부를 거야.
여름밤의 싱그런 수박 물맛도 튀어 오르고, 담장 위 고양이의 사뿐한 산책도 고여있는 집, 빨간 벽돌 사이 힘차게 움켜쥔 어린 담쟁이의 손과 새하얗게 눈 내린 아침 푸르스름한 설레임도 스며있는 집.
그 집을 품고 자랄 너를 위한 스케치, 아니 그냥 바람에 흥얼거리는 휘파람.
휘이- 민들레 꽃씨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
Xoxo,
엄마, 너의 집
#지금 너에게 보내는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yK9quPsgsL8
(네번째 공간 이야기: '향, 기억의 공간' 으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