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번째 편지- 텅 빈 우주에서 함께 울리는 우리들
인다라의 하늘에는 구슬로 된 그물이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추고 있어, 어떤 구슬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물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에게 그 울림이 연달아 퍼진다 한다.
- 화엄경
# 세번째 편지: 우리에게
ㅇㅇ야, 오랜만이야.
너는 시드니에. 서울에, 런던에, 오클랜드에, 뉴욕에, 시카고에, 텍사스에, 밴쿠버에, 헬싱키에, 멜번에, 싱가폴에, 두바이에, 카트만두에 있어.
아무리 나도, 너도, 돌아다니면서 살았다고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한걸.
어쨌든, 잘살고 있지?
우리가 만난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내가 어릴 적 뉴질랜드에 이민을 왔을 때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
어느 아침, 눈을 뜨니 나를 둘러싸고 지켜주던 성(城) 이 사라졌어. 어느 동네, 어느 학교, 어느 반 누구. 라는 소속 없이 나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어.
학교 어느 그룹에 속하는지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정해지던 정글 같은 사춘기 학창 생활.
하루아침에 나는 '나'를 바닥부터 다시 쌓아올려야 했지. 목소리를 잃은 인어처럼 아픈 다리로 휘청휘청 걸으면서.
나는 내가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 같다고 느꼈어. 순식간에 벌거벗겨져서 한낮의 대로로 내던져진 것 같았지. 속한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마치 내 존재가 모조리 부정되고 사라지는 것 같아서 무서웠어.
그러나 깨지고 발을 헛디뎌가면서 알게 됐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이 모이는 경계의 가장자리, 거기가 결국 내가 소속된 자리란 걸. 손에 쥔 확실한 평안보다 길 위에 놓인 불안정한 자유를 더 사랑하는 마음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걸.
어디를 가도 나는 나이고, 또 나는 내가 아니야.
나는 경계에서 흔들리면서 계속 이쪽, 저쪽을 기웃거리고 바라봐.
사이에 선 경계인. 흔들리면서도 경계를 지키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발 디딘 곳을 계속 의심하고, 부딪히고 흔들리면서 계속 나아가는 견자(見者, seer). 그게 나의 정체성이고 내가 가야 할 자리였어.
그리고 그 가장자리의 집에서 나와 비슷한 눈과 자세를 가진 너를 만났지.
유목민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에겐 하늘이 집인 것처럼 나도, 너도 참 많이 돌아다녀서 우리 참 만나기 힘들다. 그치?
그래도 우리의 빛이 잠시 교차했을 때 서로 나눴던 다정한 마음은 항상 내 안에 있어.
가끔 누군가가 나에게 Where are you from? 하고 물어볼 때마다 나는 잠시 대답을 주저해. 그러다가 장난스럽게 Pacific Ocean? 그러지. 오그라들게 했다면 미안. ㅋㅋㅋ
근데, 남반구와 북반구, 지구의 오른쪽 왼쪽을 번갈아 돌면서 살다 보니 결국 늘 가운데 껴있는 곳은 태평양 바다더라구.
도시와 도시, 나라와 나라 사이에 끼어있는 무소속의 섬.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그래서 뭐든지 되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거기가 나의 집이고 너의 집이야.
너의 낮과 나의 밤, 너의 겨울과 나의 여름. 동양과 서양, 여자와 남자, 젊은 이와 나이 든 이, 현실 공간과 메타버스, 과거와 미래, 그 사이 어딘가 살짝 비껴서 수줍게 놓여 있는 곳.
투명해서 보이지 않지만 빛이 닿으면 반짝거리며 문을 열어주는 그곳이 우리 집이야.
거기에서 우리 만나자.
보고싶으면 지금처럼 이렇게 신호를 보낼게.
내가 보내는 작은 어깨의 떨림이 인다라의 그물을 타고 너에게 닿을걸 믿어. 그러면 너는 아마 목소리로, 편지로, 음악과 그림으로, 오래된 책의 글귀로 다시 신호를 보낼 거야.
마른땅 갈라진 사이로 기어코 피어난 새싹, 하루 종일 수영한 뒤 맛보는 짭짤한 바닷바람, 한여름이 찬란하게 부서지는 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의 쏟아지는 반짝임으로
너는 나에게 반드시 대답을 보낼 거야.
괜찮아. 우리 여기 있어. 라고.
#지금 너에게 보내는 노래:
"달빛 항해 (몽금포 타령)", 원일 (featuring 이상은)
(from album ‘아수라’, music video by 정인지 & 57 studio)
(Resource: Gugak TV https://www.youtube.com/c/GugakTV)
(세번째 공간 이야기: '간, 사이의 공간' 으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