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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Sep 11. 2022

2.(일기) 빛

: 두번째 일기 - 지나간 나, 다가오는 나

(처음과 끝에 이 음악을 함께 듣고 싶어요)

"On the Nature of Daylight (Entropy)", Max Richter

https://www.youtube.com/watch?v=b_YHE4Sx-08

(Taken from ‘The Blue Notebooks’ (2018)

Resource: MaxRichterMusic https://bit.ly/2lt4TTg

Official Website: http://www.maxrichtermusic.com


# 너에게 가는 최단 거리:

"당신은 빛의 굴절을 인과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데만 익숙해 있어. 수면에 도달하는 것은 원인이고, 그 방향이 바뀌는 것은 결과라는 식이지. 빛의 굴절을 설명한 페르마의 원리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 건 빛의 행동을 목표 지향적인 표현을 써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야. 마치 광선에 대한 계명의 느낌이랄까. '네 목표로 갈 때는 도달 시간을 최소화하거나 최대화할지어다' 하는 식으로 말이야."
"목적지가 없다면 '가장 빠른 경로'라는 개념은 무의미 해지지. 그리고 해당 경로를 가로지르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그 경로 중간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이를 테면 수면이 어디 있는지 등의 정보도 필요해. 빛은 이전의 지점을 향해 출발한 다음 나중에 진로를 수정할 수는 없어. 그런 행위에서 야기된 경로는 가장 빠른 경로가 아니니까. 따라서 빛은 처음부터 모든 계산을 끝 마쳐야 해. 즉, 빛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하지."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

빛을 발견한 나에게,


너는 추운 몸을 움츠리며 세례당의 화려한 황금 문을 연다. 천국의 문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교회 안은 어둡고 한겨울의 추위가 고여있다. 그러나 그 추위보다 더 어둡고 더 차가운 건 네 마음이다. 이렇게 괴로운 때에 무슨 여행이냐며 내내 등만 보이고 걷던 남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바깥 어딘가 카페에서 몸을 녹이고 있겠지. 나를 벌주는 건지 남편을 벌주는 건지 모르겠지만 괜히 오기가 나서 일부러 차가운 벤치에 몸을 누인다. 등에 와닿는 냉기. 익숙한 내 집이다. 이젠 정말 끝이야.


때때로 살면서 어떤 사람, 사건, 장소를 맞닥뜨릴  왠지 모를 기시감이  때가 있다. 면밀하게 말하자면, , 이렇게   사실 알고 있었어.라는 오래전 예감의 확인에 가깝다.

목적지에 도달하고 나서야 그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종종 길을 걷고 있는 와중에  찾아오면 난감하다. 그럴 때면 계속 이 길을 걸어야 할까. 돌아서 다른 길로 가도 되지 않을까 고민하게 된다.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 같은 직감이 안개처럼 길 위에 서려 있을 때 선택은 더 힘들어진다.


너는 앞으로도 차가운 냉기를 더 자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더 내려갈 것이고, 점점 더 어두워져 어느새 어두운 줄도 모르게 될 것이다. 네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네가 변했다고 말할 것이고, 여전히 친하지만 가끔 모르는 타인보다도 먼 그 공기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만큼 너는 많이 이룬다. 많은 것을 손에 쥔다. 그리고 그만큼 가장 사랑했던 것들을 잃는다. 지금 아주 작은 틈이라고 생각한 그 균열은 점점 더 커져서 어느새 네 주위를 빨아들이고 너도 빨아들인다.


그래도 너는 계속 갈 것이다. 계속 머뭇거리고, 후회하고, 의심하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흔들리며 갈 것이다.

너는 이정표를 지나듯 한 사람, 한 사건, 한 공간을 묵묵하게, 단단하게 지나며, 지나간 시간과 공간의 퍼즐이 하나의 의미가 되어서 완벽한 우주로 짜 맞춰지는 걸 발견해 간다. 모든 퍼즐 조각의 힘은 동등했고 꼭 그 자리에 필요했다.

혼자만으로는 존재할 땐 알지 못했던 조각들은 서로 이어질 때  하나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모두 함께 떨리고 공명할 것이다. 지금의 균열, 틈은 새로운 길이 될 것이다.


길 위에 안개가 자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하게 발길을 옮기는 건, 처음 여정을 시작할 때 마음속에 얼핏 스며든 빛 때문이다.

처음과 끝의 수레바퀴가 교차하는 찰나에 잠깐 나에게 비춘 빛, 직관이라는 천사가 꿈속에서 속삭여준 목소리, 눈 앞이 진흙밭인 줄 알면서도 한걸음 내딛도록 등을 떠미는 손, 검은 바다를 지나고 나면 그 끝에 집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등댓불.

희미한 빛을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더듬더듬 만지며 따라갈 때도 있고, 때때로 만다라처럼 하나의 통일성 있는 이미지가 불현듯 찾아오는 선물 같은 에피파니의 시간도 있다.

그렇게 처음과 끝에, 길을 가는 발걸음의 끝에, 길을 찾는 시선의 끝에,


빛이 있다.


 0 + 12 개의 공간 이야기


(두번째 공간 이야기: '빛, 시선의 공간' 이야기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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