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번째 공간 | 공감 - 브라더 클라우스 경당, 피터 줌터
Note 1: 아래에는 그래픽과 사진 이미지를 이용해 개념 미술을 하는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이 인용되었습니다. 대담하고 도발적인 이미지가 다소 불편할 수도 있음을 미리 알려드리고 양해를 구합니다.
Note 2: 브라더 클라우스 경당의 아름다운 사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사진작가 TIM VAN DE VELDE (www.tvdv.be)께 감사드립니다.
# 자궁, 코라(Chora), 고통의 공간:
첫 생리를 할 때, 내 자궁은 내 안에 있는 이질적 우주, 이상한 블랙홀이었다.
그 핏빛 어둠은 불쾌했고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무서웠다.
첫 아이가 스스로를 찢고 다리 사이로 흘러내릴 때, 내 자궁은 더 이상 편안하고 행복한 집이 아니었다. 그것은 꿈틀거리는 어둠. 모든 걸 삼키는 입, 있지만 없는 구멍(void)이었다.
작두 위에 오른 무당처럼 나의 전 존재는 고통 앞에서 팽팽해졌고, 동그래졌고, 구멍이 되었다. 내 전부가 거대한 구멍이 되어 흘러내리고 지워졌다.
어둠에 먹히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고통스러워야 했다.
많은 건축가, 철학자들이 인류가 최초로 경험하는 최초의 장소이자 궁극의 공간으로 자궁을 이야기한다. 이때 자궁의 공간은 안전하고 완벽한 집의 원형 (Prototype)이자 이데아적 공간으로 그려진다.
이 담론은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할 것이라는, 또는 완벽하게 탄생시킬 것이라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신격화, 모성의 신화에 기대야만 가능하다. 여기에 실재하는 여성의 신체와 고통은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자궁은 평화로운 엄마의 모습만 하고 있지 않다.
내가 기억하는 또 다른 자궁은 지금 한창 싸우고 있는 생의 현장이다. 어쩌면 그 안에서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처럼 철저하게 외로운 실존이다.
자궁은 스스로 자궁이기 위해 얼마나 수없이 많은 어둠을 흘려보내야 할까.
많은 사람이 자궁이 내포하는 모성의 평안에 주목하지만, 생에 한번 또는 두세 번 평안을 담기 위해 자궁은 매월 어둠을 흘리고 고통스럽게 다시 태어난다.
프랑스의 언어학자이자 여성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언어의 의미화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코라(Chora)’라는 공간 개념을 새롭게 해석했다.
원래 플라톤이 묘사한 ‘코라’는 우주의 기원적 공간, 혹은 탄생할 우주를 담는 용기(container)를 가리키며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를 상징한다. 이때, 코라는 형이상학적인 틀로서 측정할 수 있는 태초의 터전이며, 존재를 태어나게 하고 동시에 기르는 장소로 쓰인다.
의식이 태어나기 위해선 의식이 존재할 시공간이 필요하다. 존재의 ‘의식화’를 위해 선행하는 장소- 존재, 우주, 개념, 명칭, 음절이 탄생하기 전, 선행하는 기본 요소가 플라톤이 존재의 어머니로 부른 코라의 공간이다.
그러나 크리스테바는 이 플라톤적 ‘코라(Chora)’의 개념에서 선행적 서열과 위계를 지워버림으로써 이 공간을 해방시킨다. 그녀는 기존 질서 속 언어의 구조화/ 탈구조화를 설명하기 위해 코라라는 개념을 차용했지만, ‘의미’ 또는 ‘기의(signified)’가 담기는 공간적 배경으로만 제한하지 않았다.
크리스테바가 해석한 코라는 다른 존재를 위한 터가 아닌, 주체가 생겨나고, 봉해지고, 스스로를 찾는 독립된 처고이다. 완벽하게 구축되고 선명하게 조직된 '상징계'(the symbolic)의 언어 대신, 모호하고, 파편화되고 부서진 '기호계'(the semiotic)의 언어가 부유하는 곳이다. 그곳은 자아의 붕괴와 생성의 공간이고 죽음의 충동과 생의 충동이 끊임없이 반목하는 곳. 존재와 비존재가 드러나고, 사라지고, 다시 생성되는 고통의 공간이다.
이 공간을 인식하고, 드러내고, 선행적 위계관계에서 해방함으로 존재 (언어)는 부서지지만, 부서짐으로써 실재한다.
#사라지는 것과 드러나는 것:
부서짐으로써 태어나는 코라의 공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가능할까.
사라짐과 드러남이 동시에 펼쳐지며 함께 생성되는 공간을 물성으로 잡아놓을 수 있을까. 건축을 처음 접한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늘 머리속에 맴돌았던 화두였다.
약간의 감각적 예민함과 성실함을 무기로 십여년 동안 건축계에 몸담고 있지만 정작 가장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질문과는 동떨어진 일을 해왔었다. 일했던 대부분의 시간 동안 번쩍거리는 고층 빌딩을 지었지만, 좋아하는 건축은 언제나 스캐폴딩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공사 중의 건물이 아니면 무너지기 직전의 유적들이었다.
존재가 희미하거나 때론 너무 무거워진 그 공간들은 무너지고 있는 나와, 무너지지 않으려 힘들게 애를 쓰며 나아가는 나를 닮은 것 같았다. 어디에도 있지 않는 나의 자리, 경계, 코라의 공간을 이 세상에 만들면, 그제야 이 세상에 내가 있어도 된다는 인정(validation)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그쪽으로 계속해서 걸어갔지만, 그건 가면 갈수록 잡을 수 없는 안개 같았다.
무엇을 짓든, 굳어진 형태(form)가 되면 그건 더 이상 내가 닿고 싶은 코라의 공간이 아니었다. 아무리 복잡한 디자인으로 형체를 끝없이 파편화시키고, 해체시킨들, 부서지는 과정, 생성되는 과정이 형상화되어서 지어지는 순간, 공간은 결정화(crystalised) 돼버리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무엇이 사람을, 공간을 나아가게 할까.
내가 얻은 답은 결국, '고통의 시간'이었다. 부서지는 과정도 태어나는 과정도 언제나 고통과 함께 온다. 그리고 고통을 충실히 겪고, 지나가고, 그 기억을 직시할 때, 사람도, 공간도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공간을 고통받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 고통이라는 개념을 상징적으로만 형상화한, 죽은 기념비로의 공간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무너지거나 쇠락한 유적이 아니라, 지금 계속 무너지고 태어나는 공간. 고통과 치유가 계속 생성되고 부유하는 공간을 물성화 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공간을 사람들이 원할까?
텅 빈 겨울 벌판에서 피터 줌터의 작은 교회를 만났을 때, 나는 드디어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것 같았다.
BRUDER KLAUS FELDKAPELLE,
BY PETER ZUMTHOR, 2007
LOCATION: GERMANY – WACHENDORF
#고통 속에 있는 것, 고통 뒤에 남는 것:
한 농부가 밀밭에서 일하다가 잠시 들어가 기도할 수 있는 작은 교회를 부탁했다.
전쟁에서 희생된 아들을 추모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지만 알려진 사실은 15세기 성인인 클라우스 성자(Niklaus von Flü)를 기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건축가의 옷을 입은 구도자이자 시인, 돈도 명예도 필요 없고 오직 자신이 마음이 동해야만 움직이는 고집 센 건축가로 유명한 피터 줌터는 농부 부부의 소박한 바람을 듣고 기본적인 설계비만을 받으며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피터 줌터는 우선 112개의 목재로 뾰족한 첨탑을 세운 후 그 위에 콘크리트를 부었다. 원목 기둥으로 만든 원추형 움막이 콘크리트 외벽을 지탱하고 거푸집으로 쓰일 내벽이 되었다.
외벽의 콘크리트 상자가 단단히 굳었을 때, 농부와 건축가는 함께 안으로 들어가,
불을 질렀다.
불은 3주 동안 활활 타올랐다.
사람과 자연의 기도는 천장의 동그란 구멍으로 검은 연기가 되어 훨훨 하늘로 날아갔다. 옹이 진 벽에는 거무스름한 재와 향긋한 나무 향이 남았고, 천장의 텅 빈 구멍에서 홀연히 빛이 떨어져 빗물이 고여있는 바닥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돋아나는 벽과 스러지는 벽:
우선, 삼각형의 목재 거푸집으로 내부를 다진 후, 내부와 그 안의 어둠을 품을 외벽을 쌓았다. 콘크리트 외벽은 가장 오래된 건축 기법의 하나인 담틀 공법 (Rammed Earth Construction)을 사용해 만들어졌다.
담틀 공법은 한국, 중국의 흙집, 아프리카, 남미와 중동의 진흙집 등에서 발견되는 고대 기법으로, 목재 거푸집을 이용하여 틀을 세우고 틀 사이에 모래, 흙, 돌, 콘크리트, 짚단 등을 채워 넣은 후 공이로 다져서 누르면서 벽을 구축하는 방법이다.
흙을 압축하면 강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별다른 구조체 없이도 벽 자체가 내력벽으로 작용한다. 단열재 없이도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할 뿐 아니라 환경친화적인 건축 기법이지만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켜켜이 벽을 쌓아가야 한다. 그래서 공시를 단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디자인의 효율성을 따지는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기법이다.
그러나 피터 줌터는 서두르지 않았다. 자연의 시간과 사람의 땀이 만날 때 싹트는 기적을 믿고 느리지만 단단하게 흙의 시간을 쌓아갔다. 채플 외벽의 가로줄은 하루에 40-50cm씩만 콘크리트를 타설 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자국이다.
#불과 별:
시간과 땀이 충분히 익어 벽체가 어떤 상처도 견딜 만큼 단단해졌을 때, 그때까지의 공간이 모두 부서지고 불 속에서 새로운 공간이 태어났다.
거푸집의 패턴과 나무의 텍스쳐가 타면서 만들어진 재는 콘크리트 벽의 표면에 밀착되어서 독특한 색과 결을 남겼다. 검은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어두운 숲에 들어선 듯하다. 색뿐 아니라 냄새도 벽에 스며들어 공간이 겪은 고통을 환기한다.
콘크리트 외벽과 나무 기둥의 내벽을 연결해주는 타이(form-tie)를 제거하고 남은 350개의 구멍은 블로잉 기법으로 유리를 불어넣어 별빛 같은 효과를 냈다. 별빛이 쏟아지는 하늘 끝. 시선이 모이는 그 끝에서 다시 작지만 영롱한 빛이 쏟아진다.
# 어둠: 기도의 집
피터 줌터의 건축에서 공간은 비어있다. 건축은 온전히 자신의 몸, 물성(materiality)에 몰입하고, 그 궁극이 됨으로써 결국 사라진다. 그리고 사라짐으로 드러난다.
조각가가 돌을 깎아서 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돌에 숨겨져 있는 상을 발견하듯이, 줌터는 재료의 특성에 몰입해 본연의 성질을 드러내 주는 것만으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건축한다.
그 고요하지만 격렬한 과정은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가장 우주적인 실재(presence)가 되어 그가 만든 공간에 스며든다. 돌이 돌이 되기 위한, 나무가 나무가 되기 위한, 빛이 빛이 되기 위한 고통의 흔적이다. 그 고통을 증거하면서 공간은 계속 생성된다.
어둠이 스민 공간과 그 공간에 들어선 이의 내면 속 어둠이 서로 반향 하는 사이, 그 사이의 빈 곳에 보이지 않는 코라(Chora)의 공간이 펼쳐진다. 칠흑같이 검고 찢겨진 구멍에 들어선 이가 물리적 공간이 주는 감각을 체화하여 영혼의 묵상으로 간직할 때, 그 지점에서 존재는 공간과 함께 자라난다.
크리스테바는 기호계의 언어가 범람하고 넘칠 때 구조화된 상징계의 언어를 침입, 전복, 해체한다고 보았다. 신체의 리듬에 발판을 두고 있는 몸의 언어, 기존의 체계화된 언어 속에서는 표현될 수 없어 시(詩)로 말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가 기호계의 언어라고 그녀는 말한다. 아직 보이지 않고 이제 들리지 않지만 계속 가득 차오르는 목소리. 이것은 죽은 언어가 아닌 살아있는 신음과 비명, 주문과 노래, 성스러움과 시(詩). 그리고 기도가 될 것이다.
건축은 어디에서 시작했을까.
건축가가 영감을 잉태했을 때였을까. 인부들의 땀방울이 첨탑 위로 떨어졌을 때였을까. 상처 위로 굳은 살 같은 콘크리트 벽이 돋아났을 때였을까. 불이 모든 시간성과 물성을 태우며 하늘로 날아갔을 때였을까. 고통의 구멍으로 조용히 들어와 기도하는 농부의 숙인 목덜미에 가만히 한 줄기 빛이 떨어졌을 때였을까.
별빛이 어둠을 밝히고 기도가 고통을 감싸는 자리. 거기에서 공간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다.
# 고통의 연대:
타버린 목재, 탄화목은 자신이 소멸됨으로 나무라는 물성의 기억을 드러내는 재료이다.
탄화목은 주로 두 가지 방법으로 만드는데, 하나는 일본의 전통 방식인 겉을 그슬려서 만드는 법, 그리고 북유럽 방식인 고온으로 나무를 통째로 쪄서 목재 내부의 수분을 날려버리는 법이다. 두 방식 모두 한 번에 탄화목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정성을 들여 천천히 만든다. 한 번에 너무 태워버리면 쉽게 바스라지는 재가 되기에 계절이 품고 있는 수분과 나무가 품고 있는 수분을 잘 관찰하면서 천천히 조금씩 오래오래 태워야 한다.
이렇게 수분이 날아간 나무는 비틀어지지 않는다. 원래 목재는 수분을 머금고 있어서 계절에 따라 늘어났다 줄어든다. 이 과정이 계속되면 결국 틀어지거나 갈라지는데, 탄화목처럼 이미 이렇게 스트레스를 통해 수분을 날린 나무는 내구성과 강도가 향상되어 변형되지 않고 쉽게 부패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기능과 미가 함께 통합된 간결함을 가진 재료,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노력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지는 질감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 있다. 이러한 재료는 물성 그 자체로 이야기(storytelling)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피터 줌터의 공간과 탄화목의 재에서 내가 찾은 것은 고통을 견딘 것들의 흔적이었다. 상실을, 혼돈을, 고통을, 그리고 탄생을 겪은 공간. 그 곳을 바라보는 동안 천천히 내 안에 연민이, 위로가, 그리고 공감(empathy)의 공간이 피어났다. 고통을 내재한 공간, 아픔을 견딘 공간이 말해주는 이야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따뜻했다. 마치 너만 그걸 겪은 건 아니야. 너도 아팠구나. 나도 아팠는데. 그러나 우리 둘 다 아직 여기 있어.라고 조용히 어둠이, 우주가 내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눈물이 마른자리, 반짝이는 별빛이 내려와 살포시 내 옆에 앉았다.
위의 사진은 산불이 지난 후 새 생명이 자라고 있는 시드니의 산이다.
몇 년 전, 내가 살고 있는 주에서 호주 최악의 산불이 났었다. 약 1,860헥타르의 숲이 사라졌다. 한국 면적의 85%정도가 불에 탄 셈이다.
시드니의 여름엔 중앙 사막에서 열풍이 불어오는 기간이 있어서 매년 산불의 위험을 안고 있다. 어떤 나무나 풀들은 아예 그 생애에 산불을 예측하고 있어서 불에 타야만 열매가 벌어져 발아되는 씨앗을 키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의 산불은 이례적인 자연의 분노였다.
그 후,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lockdown기간 동안, 나는 산을 많이 걸었다.
분노가 모든 것을 훑고 간 뒤, 산은 상처를 품고 다시 자라고 있었다. 죽음이 지나간 자리. 벌건 속살이 드러나고 껍질은 검게 그슬렸다. 그러나 아기 손처럼 주먹을 꼭 쥐고 자라나는 고사리와 포슬포슬 온 산을 덮어주는 이끼로 빈 곳을 채우면서 숲은 다시 자란다. 산불마저 생명으로 안아버리는 시간의 힘.
살아남지 않을 것이다. 살아간다.
# 다시, 별과 불
온전히 구멍을 끌어안았을 때,
그 안은 더는 어둡지 않았다.
향긋한 나무 향이 났다.
고통은 기도였다.
어둠 속에 일렁이는 불씨를 발견했을 때,
구멍은 다시 집이었다.
태아가 형성되기 전, 수정란이 아직 난황의 상태에 있을 때 아기집(태낭)이 먼저 생긴다.
생명은 몸을 만들기도 전에 집부터 만든다. 물로 가득 차 있는 부드러운 막의 보자기다. 보자기 한 자락 자궁의 벽에 단단히 묶어서 자기의 집을 만들고 나면, 태아는 그제야 자라기 시작한다.
네가 아직 보이지 않을 때, 대신 자라는 집의 크기를 매주 재며 나는 너의 존재를 확인했다.
보이지 않지만 격렬한 기운으로, 집을 짓는 열심히 네가 거기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 먹히지 않고 너의 불이 아른거리며 만들어낸 얇은 막.
그 때, 네 집은 너의 실재 (presence)였다. 내 집 안에, 네 집이 자라고 있었다. 내 안에 네가, 네 안에 내가 있었다.
어디선가 고요한 음악이 들려왔다.
그걸로 충분했다.
더 나누고 싶은 것:
Peter Zumthor - by SOO JIN KIM
Covid Lockdown동안 하루 한명씩 연필초상화를 그렸어요. 저에게 힘이 되어주신 가족, 친구, 지인, 그리고 영혼의 스승님들을 그리면서 어둠을 바라봤습니다. 62번째로 그렸던 피터 줌터와 73번째로 그렸던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초상입니다.
지금, 울리는 음악:
"The hours" by Phillip Glass
- Youtube link, Channel by Chris Georgiadis
어둠 속에서 제가 들었던 음악을 같이 나누고 싶어요. 때로 음악은 어떤 말보다 더 깊게 전해지니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Wkof3nP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