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번째 공간 | 공감 - 빨간 벽돌 불란서 집
#기억의 냄새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은 어느 날 과자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 한 입 베어 문다. 그리고 곧, 마들렌과 홍차의 냄새 속에서 어릴 적 고향의 기억을 떠올린다.
아이가 태어나 가장 먼저 경험하는 감각은 후각이다.
막 태어났을 때의 아이는 시야 15센티정도 검은색과 흰색만 희미하게 구별한다. 불분명한 형체들이 둥둥 떠다니는 뿌연 세계를 뚫고 뚜렷하게 전해지는 것은 향기이다. 자기 팔다리가 자기 것이라는 자각도 없는 이 미약한 생명체는 자신이 태어난 줄도 모르면서도 본능적으로 엄마의 젖냄새를 찾아 고개를 돌린다. 후각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가장 원초적인 감각이다.
시각이나 청각 같은 다른 감각과는 달리, 후각을 통해 인식된 정보는 대뇌가 아니라 변연계로 전달된다. 변연계는 편도체, 해마 등 뇌에서 감정과 특히 장기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다. 위의 마들렌 이야기에서 유래한 말인 프루스트 효과는 어떤 특정한 향이 우리에게 단순히 그 향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오랫동안 간직된 깊은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그 때의 감정까지도 환기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프루수트 효과는 이러한 후각의 특성 때문에 생겨난다. 반대로 어떠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특정한 냄새가 연상될 수 도 있다.
마르셀이 마들렌의 향기를 맡으면서 떠올린 기억은 어린 시절의 시간뿐 아니라 유년의 시공간, 마들렌 향이 가득 찬 추억의 집일 것이다. 그리고 과자를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 달콤하고 촉촉한 마들렌의 맛, 부엌 창으로 쏟아지는 나른한 햇살과 홍차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김같은 풍경. 그 기억의 장소에 스민 나른한 소우주일 것이다.
마르셀의 마들렌 향기처럼 나의 기억에 깊이 새겨진 냄새가 있다.
오래된 나무집 냄새.
향긋한 소나무 숲 냄새와는 다르다.
매끈하게 뽑아진 현대 건축의 나무 마루 바닥 매캐한 오일 냄새와도 다르다.
오래된 책 냄새, 가을 떨어진 나뭇잎 더미를 툭 찼을 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흙냄새 같다.
그렇지만 너무 습하거나 퀴퀴하지 않고 왠지 고적한 냄새. 시간의 먼지가 쌓여서 만들어내는 오래된 집의 체취이다.
어릴 적 한국에서 살던 집. 서울 끄트머리 강북. 어느 골목의 빨간 벽돌 양옥집.
내 마음에 각인된 첫 집의 기억.
마루도 벽도 천장도 온통 나무였던 집. 계단도 난간도 문턱도 창틀도 온통 나무. 나무. 각기 색도 패턴도 다 다른데 미묘하게 조화를 이루던 나무들.
엄마는 그것도 모자라 동네 놀이터에서 나무 자르던 아저씨들에게서 얻은 그루터기들로 화분 받침을 만들어 집안 곳곳 수십 개의 화분을 키우셨다.
벽은 빨강과 보라색이 오묘하게 섞인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적벽돌, 변새벽돌, 또는 파벽돌로 되어 있다. 지붕은 비대칭의 경사지붕인데 현관 입구와 베란다는 무슨 서양 신전을 들어서는 것마냥 정체불명의 화강암과 콘크리트 난간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계단 옆과 발코니, 베란다 난간마다 제라늄, 베고니아, 소철, 접란.. 크고 작은 화분이 즐비하다.
마당엔 잔디와 크고 작은 바위, 향나무와 과일나무, 그리고 그 사이를 메꾸는 소박한 꽃들로 빽빽하고, 한쪽엔 겨울이면 꼭 꽁꽁 얼어버려 옷을 입혀줘야 하는 콘크리트 수돗가와 장독대가 있다. 박공지붕 있는 철제 대문에선 갓 칠한 까만 페인트 냄새가 나고 담쟁이넝쿨이 잔뜩 덮인 담벼락, 아이 키를 조금 넘는 콘크리트 담과 콘크리트 쓰레기통 위로 동네 고양이들이 다 몰려와 고로로롱 자고 있다.
#프랑스도 아닌 불란서 집
불란서 집, 불란서 빌라, 양옥집으로 불리는 집.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한참 유행하던 단독주택의 별칭이다.
60-70년대 ㅋ자형 개량 한옥집과 90년대 다세대 연립주택과 아파트 사이에 끼어, 딱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 많았다가 이제는 많이 사라진 주택의 형태를 말한다.
프랑스 집도 아니고 도대체 왜 불란서 집일까.
프랑스와 딱히 연관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때엔 그 이름이 세련되고 ‘있어 보이는’ 이름이어서 그랬다고 한다. 때수건이 이태리타월이 된 것처럼.
해외여행도 불가능했던 시대에 서방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욕망이 상업성과 만나 만들어낸 이름. 불란서 집.
건물의 형태는 1900-1920부터 시작되어 Arts and Craft Movement와 함께 서구에서 유행했던 방갈로 스타일에 뿌리를 걸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방갈로 스타일은 원래 홀리데이 하우스 형식으로 시작했다가 2차 대전 후 1950년대까지 이어지며 보편화된 주택 형태이다. 경사진 지붕과 빨간 벽돌의 외벽. 석조 외관의 강조된 현관과 넓은 베란다가 주요 특징이다.
그러나 서구의 단층, 또는 1.5층 방갈로 스타일과는 다르게 한국의 양옥집은 보통 2.5층이다. 지상에서 살짝 위에 위치한 1층, 도로보다 조금 낮은 반지하, 1층보다 살짝 작고 별도의 외부 계단을 갖춘 2층, 그리고 넓은 베란다가 모인 형태인데, 보통 1층엔 집주인이 살고 2층과 반지하는 세를 주어 조금이라도 가계수입을 늘리려 하는 경우가 많았다.
70년 후반-80년대 새마을 운동과 함께 주택의 형태와 주거문화도 크게 바뀌었다.
욕망을 위해 서울로 온 사람들로 인해 도시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80년대. 해결책으로 단독주택의 다가구화가 진행되었고 집은 대가족, 친척이 다 함께 모여사는 한 가구의 공간에서 서로 남남인 이웃들이 포개져 사는 핵가족 공동체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각 층마다 다른 가구가 거주하지만 형태적으로는 아직 단독주택인 불란서 집은 이러한 과도기적 시대상을 보여준다. 또한, 마당을 집 가운데 품고 수평적으로 움직이는 전통적인 한옥의 동선에서 벗어나, 마당은 전면부로 빼어내면서 독립시키고, 각 층별로 각기 다른 가구가 살면서 수직적으로 이동하는 형태로 바뀌면서 생활 동선도 입체적으로 복잡해지고 공간의 쓰임도 다중적, 유동적이 되었다.
지하실 살던 친구 순옥이, 남동생과 함께 마당에서 술래잡기를 하던 기억이 난다.
아슬아슬하던 2층 계단 사이 빈 공간, 지하실 사람들이 이용하던 비밀의 뒷문, 낮은 벽돌담은 아이가 뛰어오를 수 있을 만큼 적당한 높이였고, 종종종 걸을 수도 있는 발 한 폭의 두께여서 우리는 집의 모든 구석구석을 탐험하고 점령했다. 담벼락을 타고 뒷마당에서 앞마당으로 돌아다니거나 쓰레기통을 밟고, 대문 위 박공 지붕에 올라가 숨기도 했다.
수평적 동선과 수직적 동선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기보다는 암묵적으로 여기저기 포개어져 있는 불란서 집은 곳곳에 숨거나 찾을 구멍이 많았다.
2층 베란다 장독대 사이, 계단 아래,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과 모란 꽃대 사이 곳곳에 널린 작은 공간들은 딱 어린아이가 모험하기 좋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고 스릴 넘쳤다.
집주인이든 셋집이든 그런 건 어른들 이야기였고, 한 폭 담 위에선 우린 다 그냥 어린 길고양이들이었다. 순옥이랑은 유치원 시절 내내 단짝이었다. 마당 구석엔 딸기도 고추도 자라고 있어서 종종 빨간 벽돌을 으깨 만든 고춧가루로 딸기 김치를 버무렸다. 남동생이 우리 야매 레스토랑의 단골 희생양이었다.
#집의 이름을 결정짓는 것
집의 이름을 결정짓는 건 무엇일까. 국제 주의 양식(international style)이나 모더니즘 같은 경우를 보면 주택이 지어진 시대적 배경, 특정한 형태나 건축적 프로그램이 디자인 양식의 이름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디자인 양식의 콘텐츠를 결정짓는 것은 다음 질문에 대한 그 시대의 해석이다.
1. 집에 누가 사는가 – 그 시대, 사회의 ‘가족’이라는 기초 공동체의 의미, 어디까지가 ‘가족’, ‘식구’인가
2. 집에 어떻게 사는가 – 그 시대, 사회 안에서 ‘가족’이 사는 하루, 한 달, 1년의 생활 패턴,
나와 가족 사이에서, 가족과 이웃사이에서 이웃과 사회 사이에서 어떻게 연결되는가
3. 집에 왜 사는가 – 그 시대, 사회 안에서 ‘가족’과 그 구성원이 가지는 욕망의 발현.
나의 욕망, 가족의 욕망, 동네 사람들의 욕망, 이 사회와 이 시대의 욕망은 어디로 가고 왜 거기로 가는가.
80년대 불란서 집이 대표하는 정서는 소시민들의 집합적 가치이다. 각각 다른 꿈과 욕망의 조각들이 쌓이고 섞여 이 집의 엉뚱한 이름이 되었다.
전쟁 후 아버지 세대가 부재했던 시대, 하나하나 자신의 손으로 벽돌을 지어 올렸던 어린 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 아버지 어머니의 꿈이자 첫 성취였던 불란서 주택. 한옥에서 아파트 시대로 가기 전 잠깐 거쳤던 과도기의 기록.
뿌리도 없고 뒤죽박죽 동서양이 섞인 말도 안 되는 촌스런 스타일이지만 그래서 뭐든지 갖다 붙여도 되는 집이다. 층과 층의 경계, 안과 밖의 경계, 담 안과 담 밖의 경계가 다 불분명하게 섞이는 공간이다.
큰 창과 마당, 베란다를 통해 한옥만큼은 아니지만 아파트보다는 더 많이 주택 외부의 빛, 바람, 소리, 냄새를 내부로 불러들일 수 있다.
분리되어있지만 섞여있고, 섞여있지만 간섭받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불란서 집의 특징은 그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생활양식, 주거 요구에 따라 공간도 계속 변해왔다는 것이다.
동선에 따라 집의 앞과 뒤, 위와 아래가 섞이고 침투한다. 우리 집과 옆집의 경계가 느슨하고 길과 마당의 경계도 느슨하다. 재정적 안정을 이제 막 이룬 이와 이루려고 시작한 이와 이루지 못한 이가 다 함께 포개져 사람 냄새나게 섞여 살면서 확장되고 이어지는 집합체, 점점 같이 자랐다가 지금은 다 늙고 추억 속으로 사라진 공간. 여러 가지 표정과 소리가 우르르 몰려다니고 왕왕 싸우고 엉엉 울고 소란소란 속삭이는 집.
그 안에서 엄마 아빠가 가장 잘 만든 것은 집이 아니라 나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 집에서 나는 느슨하게, 약간 서럽게, 그러나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자랐다. 그 집에선 뭐든지 자꾸 자랐다. 화초도 자라고, 젊은 엄마 아빠의 서툰 꿈도 자랐다.
할머니는 이사오자마자 잔디를 뽑고 한 곳에 호박과 고추, 깻잎을 심으셨고, 토끼장, 닭장, 새장, 다람쥐 집, 개집을 미니 아파트처럼 쌓아놓으셨다. 2층 가는 계단엔 엄마와 할머니가 만든 송편이나 김치만두가 항상 늘어져 있어서 괜히 들락거리면서 몰래 주워 먹었다. 명절이면 친척들이 몰려와 화투를 치고, 싸우고, 울었다가 다시 서로를 안았다.
목련 옆자리에 아빠는 감나무와 바나나를 심으셨다. 큰 집 며느리 노릇도 직장일도 하면서 나와 내 동생에게도 열심이었던 엄마는 그것도 모자라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뭐라도 자꾸 만들었다. 지점토 인형도 만들고, 종이꽃도 만들었다. 조금이라도 쉬면 불안하신지 자꾸 브라더 미싱을 돌려서 손에 닿는 모든 가구를 레이스와 리본으로 싸기 시작하셨고 밥통 손잡이도, 피아노 뚜껑도, 테이블도, 의자 다리도, 심지어 휴지곽도 덕택에 레이스 모자를 써서 따뜻했다.
그렇게 엄마는 우리 집을, 우리 마음을 감쌌다.
맨손으로 열심히 쉬지 않고 집을 짓는 아빠 엄마의 등을 보면 가끔 날 것의 상처가 배어 있는 것 같아 이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래도 그 품에서 어린 나는 슬픔 너머에 숨어 있는 질긴 희망을 배웠다.
희망은 여리지만 계속, 계속 피는 들꽃이었다.
집 바로 앞에 있던 앞산에선 가끔 파랑새 비슷한 산새가 날아들기도 했다.
동네 할머니들과 아이들이 약속도 하지 않고 모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름도 모르는 놀이를 하면서 보냈던 작은 산.
봄이 되면 아카시 꽃이 떨어져 온통 하얗게 변했던 앞산. 바람에 흩날리는 흰 꽃비를 맞으며 순옥이랑 나는 아카시 꽃을 주워와 꿀을 만들었다. 어김없이 또 동생이 야매 레스토랑의 희생양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빈 산에 사람들은 아카시나무를 심었다.
황폐한 땅 위에선 어떤 나무를 심어도 잘 자라지 않지만 아카시나무는 왕성한 생명력으로 자란다. 벌거벗은 겨울산 언 땅을 서로 손 뻗어 그러모으며 미끄러지는 산을 붙들고 버틴다.
공기 중에 질소를 끌어와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누구보다 빠르게 자란 후 수령이 다하면 다른 나무들에게 터를 비켜주며 조용히 물러난다.
한 때 산을 다 덮었던 아카시 나무는 이제 다른 울창한 숲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아카시 향 가득하던 봄,
벽 전체 가득한 창문을 열면 바로 집 앞의 앞산 풍경이 방 안 아랫목까지 깊게 들어오던 집.
창가에 앉아 동생하고 서로 발을 밀면서 장난하던 한가로운 날, 등 뒤로 눈부시게 쏟아지던 햇살을 맞으면서 나는 이 장면이 영원히 내 영혼에 각인될 것을 느꼈다.
여름밤 저녁 먹고 나면 2층 베란다에 돗자리를 깔고 앞산 소쩍새 소리를 들으면서 모두 모여 수박을 먹었다.
모기향 피워놓고 서로가 서로의 무릎을 베고 누워 별 보고, 골목에 사람이 오건 말던 아빠가 자꾸 노래를 불러서 나는 창피해지고,
그러다 어딘가 오래된 나무 냄새가 코끝 찡하게 밀려오고,
빨간 벽돌집의 대문이 활짝 열리고,
.
거기로. 그곳으로 영원히 돌아간다.
참고자료 소개:
#건축가 승효상 님의 글, “불란서 미니 2층집과 마당 깊은 집”
http://www.iroje.com/essay/136058?ckattempt=1
출처: 이로재 홈페이지
불란서 집에 대한 윗글과는 다른 견해를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불란서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 그리운 주관적 기억이 많이 남았는데... 이렇게 상반된 견해를 듣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되더라고요. 각자 어느 시기에 어느 공간을 경험했는가에 따라 같은 공간도 다른 모습을 뜻할 수 있다는 것이 늘 흥미로와요.
#더 나누고 싶은 것:
"남매의 여름밤" (film), directed by 윤단비
불란서 집을 배경으로 기억의 공간에 고인 남매의 성장 이야기를 보여주는 영화. 집도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 주인공 소녀한테 제가 많이 이입했었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