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번째 공간 | 공감 - 공간 사옥, 김수근
: 네번째 공간 | 공감 - 빨간 벽돌 불란서 집
안과 밖이 중첩되고 교차하며
공간의 밀도도 높아진다. 풀어진다. 흘러간다.
한옥의 공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 사옥의 입구
#품: 공간이란 꽃
저녁 8시, 현관에서 아버지가 퇴근하시는 인기척이 난다. 나와 동생은 우와 아아- 소리 지르며 앞다투어 이불속으로 숨는다. 폭신한 솜이불 안에는 엄마 냄새가 달큼하게 고여있다.
서로 킥킥거리며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아빠는 이 녀석들이 어디 있지? 이상하다? 하면서 살금살금 다가오셨다가 갑자기 요 녀석들! 하면서 휘까닥 우리가 덮고 있는 이불을 젖히신다. 쌉쌀한 밤 냄새, 매캐한 길 냄새, 서글픈 술 냄새....아빠의 머리카락 위에 얹혀있는 바깥 냄새가 훅- 불어 들어온다. 버둥거리는 우리에게 까끌까끌한 수염을 억지로 비비면서 아버지의 노곤한 하루도 벗겨져 간다. 땀 내 찌든 양말을 던지고, 아빠는 따뜻하고 푹신한 솜이불의 세계로 들어온다.
공간이란 꽃이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길, 집, 현관, 방, 이불로 이어지는 물리적 공간이 하나의 꽃잎처럼 서로 포개어져서 여름밤의 냄새와 포근한 이불의 촉감, 단단한 아빠의 품의 공간과 만날 때 꽃은 활짝 피어난다.
여러 개의 꽃잎이 포개어지며 만들어졌다가 만개할 때야 살짝 드러나는 사이의 공간. 장미꽃 아래(under the rose)를 뜻하는 ‘sub rosa’라는 라틴어는 비밀, 내밀함을 의미한다.
‘공간의 시학’의 저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시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상상력의 공간을 설명하면서 집 속의 내밀한 공간들을 언급한다.
집의 실내, 구석, 장롱, 서랍 등의 공간은 집이 가지는 내밀함의 총체이다. 그는 포개진 공간 속 공간에서 우리가 내밀함과 친밀함을 느끼는 이유를 요나 컴플렉스,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태 귀소본능이라는 원형적 무의식에서 찾는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요나는 소명을 피해 도망갔다가 고래에게 삼켜진 예언자, 그곳에서 살아 나와 회개하는 인물이다.
심리분석학자 칼 융은 자신의 소명을 피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성향을 설명하기 위해 요나 컴플렉스라는 말을 만들었지만, 바슐라르는 이미지와 상상력의 관계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 개념을 끌어왔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요나 컴플렉스는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을 때의 체험으로 인해 인간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원형적 이미지이다. 겹치는 공간, 꼭 맞는 공간, 몸과 몸이 포개어져 만들어지는 품의 공간이 우리를 안심시켜주고 고향으로 돌아온 듯 편안하게 해주는 이유는 이러한 상상력의 보편성, 원형적 이미지로 인해 시적 교감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알: 어머니의 자궁, 공간의 집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쓰고 숨으면 그 안의 어둡고 폭신한 공간은 조그만 알 – 무의식에 각인되어있는 첫 집의 경험을 소환한다.
엄마의 자궁 – 따뜻한 물의 기억, 적어도 이 안에선 안전한 집의 원형 – prototype.
이러한 자궁의 신화적 이미지와 모태 귀소본능을 자신의 건축 철학으로 받아들여 발전시킨 사람은 우리나라의 김수근 건축가이다.
그는 한평생 건축을 통해 ‘어머니’를 공간화하려 했다. 김수근의 건축에서 집은 자궁이고 자궁은 궁극의 공간이다.
"나의 집은 자궁입니다.
내 집은 자궁이고, 자궁의 집은 어머니이며,
어머니의 집은 가옥이며, 집의 집은 환경입니다.
환경이 철학적으로는 공간이 되겠는데,
공간은 집의 집의 집입니다. "
– 김수근
70년대 근대건축이 정체성을 고민하며 갈팡질팡할 때, 김수근을 비롯한 몇몇 건축가들은 전통 건축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김수근은 단순히 전통건축의 외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 안에 담겨있는 철학에 주목했다.
한옥의 근간이 되는 주역사상과 천. 지. 인의 조화를 추구하는 천부경의 삼재 체계. 즉, 하늘과 땅을 사람이 연결하여 완성하는 원리를 바탕으로 사람과 사람의 운동이 곧 집이 되는 인본 중심적인 건축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 궁극의 집인 자궁. 사람을 낳는 공간. 그에게 이 공간은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완벽한 보호와 양육의 공간이며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회복의 공간을 의미한다.
김수근 건축의 대표작이자 한국 근대 건축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공간사옥’은 이러한 김수근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당시에는 생소한 개념인 스킵플로어 사용으로 공간들이 서로 틈입하고 교차하고 포개진다.
(스킵플로어(skip floor)는 한국과 일본에서만 쓰이는 변형된 건축 용어로 영어권에서는 스플릿 플로어(split floor)라고 한다. )
스킵 플로어는 일반적으로 1층분으로 건물이 높아지지 않고 반 층씩 바닥이 어긋나고 교차되면서 높아지는 공간 구성이다. 입체적인 공간을 설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선이 단축되고 제한된 면적에서 공간 효율성이 높아질 수 있다. 또한 각 층마다 실내가 개방되고 유기적으로 소통되면서 그 사이에 복잡하면서도 다이내믹한 공간을 낳는다.
이 공간들은 때에 따라 회의실이 되기도 접대실이 되기도 하는데, 그 사이사이를 다소 낮거나 좁지만 불편하지 않은 계단, 복도, 다리들이 이어준다.
손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아기자기한 공간들은 서로 지배하지 않고 대신 겹겹이 감싸 안는다. 공간과 공간은 닫혀있지 않고 서로 보이고 마주 보며 안아준다. 그리고 그 사이를 빛과 시간의 주름이 채운다.
#품의 공간이 열어주는 세계:
공간이란 인간의 몸이 세계와 소통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 메를로 퐁티
아이가 6살쯤 되었을 때 갑자기 죽음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한밤중에 깨어나 엄마가 죽는 꿈을 꾸었다고 엉엉 울거나 하루에도 몇십번씩 안아달라고 꼭 안아달라고 보채기 시작했었다. 화장실을 가다가도, 엄마 안아주세요. 돌아섰다가도 다시, 엄마 더 세게 안아주세요...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해보다 결국 찾아간 상담 선생님은 그 나이에 생기는 정상적인 발달과정이라고, 그리고 아이는 누구보다 그 불안을 잠재우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찾은 거라고 알려주셨다.
품.
나와 타인이 꼭 안으면 생기는 살 냄새의 공간.
갑자기 깨어나 내가 삶과 죽음 사이의 낭떠러지에 서 있다는 걸 느낄 때, 한 발 잘못 내딛으면 그 까마득한 심연의 깊이로 빠져들 것 같을 때, 내 아이는 달려와 나를 안았다. 서로의 살 냄새를 맡으며, 몸과 몸 사이 꼭 끼여 감싸 안아지며 우리는 우리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이 물성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을 확인했다.
몸의 공간, 품의 공간은 우리가 이 세계- 안온하고, 보호받고, 살아있는 세계에 다시 돌아오는 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자궁이 가지는 공간적 의미와 모성을 연결해서 여성의 신체를 신화화하는 접근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모성은 경험이 쌓여 만드는 과정의 개념이고 굳이 아이와 여성의 관계에만 국한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자궁 안에서의 태아의 경험을 완벽한 평안으로 승화시키는 것 또한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밀한 공간과 그 안의 안락함을 상상할 때 떠오르는 엄마의 품, 그리고 그 이상을 현실화된 공간 안에서 펼치고자 했던 김수근의 공간을 만날 때 마음에 전해져 오는 이 울림은 무엇일까.
그건 물리적 계산에 만들어진 공간의 힘을 넘어서는, 공간에 담긴 사람의 꿈이 전해주는 힘이 아닐까.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를 보살피고, 안고 품어주는 마음. 살과 살이 만나는 지점의 온기, 그 온도의 힘이 아닐까.
공간 사옥은 여러번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지금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건축가 김수근, 사람 김수근이 거기에 심어놓은 마음. 그 품의 공간에 대한 그리움과 염원. 그것은 계속 공간의 우주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평안을 주고 다시 여행을 떠나게 한다.
#공간의 꽃:
바슐라르가 요나 컴플렉스를 언급하면서 다루는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은 ‘부활’의 개념이다.
요나가 고래의 입에서 뱉어져 나와 다시 소명을 직시하면서 길에 오르듯이 완전한 평안에서 힘을 얻은 인간은 다시 여행의 길에 오른다.
김수근이 꿈꾸는 자궁의 공간은 아름답지만 이상적이다. 그러나 그 이상을 마음에 두고 걸어가는 동안 생성되는 길의 공간은 지금 이 현실에 있으면서 위로를 줄 수 있다.
오목과 볼록이 꼭 끼어졌을 때의 가득함. 그 가득함의 기억을 안고 계속 존재는 여행한다.
이불을 젖히고 나와 서로의 품 안에서 함께 위로할 때 느껴지는 마음의 울림, 공감의 세계를 마음에 담고, 그렇게 세상과 다른 이들을 품고, 품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길을 떠난다.
내 아이는 하루 백번 내게 안겨지고 또 안겨지면서도 다시 뒤돌아 자신의 불안을 직시했다. 안겨진 만큼의 힘을 얻고 다시 한 걸음 걷고 다시 불안해지면 돌아와 안기고 그리고 또다시 내 품을 떠났다. 그렇게 안기고 안으면서 나는 집으로 다져지고 내 아이는 길로 다져졌다.
우리의 품 사이 공간에서 환한 빛의 꽃이 피어났다.
김수근의 공간은 항상 어디론가 가고 있다.
Human scale을 고려해 꼭 몸에 맞는 공간을 잘게 쪼개고 포개어 사람이 공간에, 공간이 공간에 ‘담기도록’ 했지만 그 공간은 막혀있지 않다.
어둠 속 어딘가에서 빛이 스며들어오고 빛 속에 어둠이 말갛게 고여있다. 빛과 어둠, 매스와 보이드을 적절히 배치하면서 한 공간은 다른 공간으로 사람을 이끌어가고, 그 여정을 통해 사람과 사람, 공간과 공간, 사람과 공간 사이의 대화, 활동, 자취, 시간이 남겨진다. 문도 없고 층도 포개져있는 이 장소에서 사람과 공간은 서로 둘러싸고, 감싸고, 연결되고, 바라본다.
품과 길의 대화, 채워진 공간과 빈 공간이 서로 부딪히고 대화하면서 일어나는 반향은 공간 안을 여행하는 이의 마음에 그대로 전해지면서 또 다른 여행을 하게 한다.
어쩌면 그가 공간의 궁극이라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품은 완벽하게 상대를 끌어안아서 가두고 있는 닫힌 공간이 아니라 걸음마를 하는 아이를 걱정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선같은 공간이 아니었을까.
걸음마를 하던 아이가 넘어져 손을 뻗으면 달려가 잠시 품어주지만 다시 일으켜 세워 먼지를 털어주고 괜찮다고, 다시 너는 너의 길을 가라고, 살짝 등을 떠미는 손 같은 공간. 연약한 존재들이 같이 자라고 서로 키워주는 마음의 터.
그래서 김수근의 공간에선 그리움의 정서가 고여있다. 기억의 그리움인지 닿을 수 없는 꿈의 그리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게 할 힘을 준 다는 것이다.
그리움을 품고 꿈꾸게 하는 공간 안에서 존재의 시선은 조용히 내면으로 향한다.
그 품에서 잠시 쉬다가 다시 세상에 나갈 힘을 얻는다.
"경계란 어떤 것이 거기에서 종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로부터 어떤 것이 자신의 본질을 펼쳐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 하이데거
품의 공간은 결국 길로 흐른다.
우리의 경계는 나와 너를 막는 담이 아니고 내가 너에게로, 네가 나에게로 향하는 손이다. 함께 가는 첫발이다.
오목에서 볼록으로 이어지는 곳.
우리의 손이, 몸이, 마음이 포개어진 자리.
그 품에서 피어나는 꽃이여.
오래. 그렇게 있거라.
# 참고자료 소개:
Re-Visit SPACE: 공간 사옥 구관 다시 보기
https://vmspace.com/report/report_view.html?base_seq=MTMxOQ==
(출처: 공간 매거진 홈페이지, 글: 김현섭 교수)
'공간의 집'부터 지금의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까지. 공간 사옥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시는 김현섭 교수님의 칼럼입니다. 건축적으로 좀 더 자세하게 읽고 싶으시면 참고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