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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Oct 05. 2022

6. (공간) 고이는 공간

: 여섯번째 공간 | 공감 - 하메르스회이 그림 속 공간 / 음예 예찬

#빛, 그늘: 고이는, 머무는, 퍼지는


인간이 찾은 가장 첫 번째 집(Shelter)은 동굴이다. 그럼 인간이 만든 첫 번째 집은 무엇일까?


문득 손 그늘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리쬐는 햇빛 아래 잠시 눈 위를 가려 만드는 손 그늘.

동굴 밖으로 나온 인간은 가장 먼저 이렇게 손 그늘을 만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가장 큰 나무로 갔겠지. 나무 아래에서 큰 나뭇잎과 가지를 모아 더 큰 손 그늘 – 천막을 만들었을 것이다. 해를 피하는 천막, 비를 피하는 우막, 유목민들의 성막. 이러한 ‘막’으로 만든 그늘 – 해와 비를 피해 허공에 가볍게 긋는 선과 그 최소의 몸짓으로 만들어지는 아늑한 빈 공간. 그것이 인간이 동굴을 나와 만든 첫 번째 집이 아닐까.


그늘이 생기기 위해선 우선 빛으로 나가야 한다. 그 빛을 마주했을 때 내 안으로, 내 뒤로, 그늘이 생긴다. 

때로 너무 강한 빛은 오히려 암흑 같을 때가 있다. 강렬한 빛의 현실 아래 눌려 존재가 이지러지는 것 같을 때, 그늘은 조용히 뒤에서 고인다. 존재는 그 안에 머물면서 잠시 숨을 돌린다.

#그늘의 춤: 닿지만 닿지 않는


어릴 적 나는 공상에 깊이 빠지는 아이였다. 

공상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만큼 강렬했고, 다채로웠고 깊었다. 

자라면서 썰물이 빠져나가듯 공상의 세계가 떠나갔을 때, 빈자리를 채운건 그늘의 시간이었다.

심연의 바닥을 기어 다니는 듯한 우울과 밤을 새워도 피곤하지 않던 미친 열정 사이의 간극을 종종 침잠된 침묵의 시간이 채웠다. 이름 없고 색깔 없는 시간이었다. 자료수집을 하고 낙서를 하고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면서 온종일 뭔가 깨작거렸지만 결국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무 의미나 성과도 남지 않고.... 그렇다고 큰 기쁨이나 슬픔도 못 느끼면서 그냥 그렇게 지냈다. 그런 하루들이 매일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어떤 날, 아침 햇살 밑에 아픈 고양이처럼 오도카니 누워 있다 다시 눈을 뜨면 햇살은 어느새 내 몸을 빗겨 나가 저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직 발치에 머물러 있는 한 줌의 햇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나처럼 의미 없는 먼지들이 조용히 반짝. 반짝. 그 자리에서 춤을 추었다. 어떤 덩어리의 감정들이 늘 목에 걸려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Interieur Strandgade 30 anagoria" (Vilhelm Hammershoi)  Resource: Wikimedia Commons (Public)
"Interior with an Easel, Bredgade 25" (Vilhelm Hammershoi)  Resource: Wikimedia Commons (Public)


빌헬름 하메르스회이 (Vilhelm Hammershoi (1864. 5. 15 ~ 1927. 2. 13)의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 부유하던 먼지들과 그늘 안에 고여 있던 기억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세기 말 북유럽, 피터 일스테드(Peter Ilsted), 칼 홀소에 (Carl holsoe), 빌헬름 하메르스회이(Vilhelm Hammershoi)는 실내에 스며든 빛과 소박한 일상의 풍경을 주제로 가족사와 집의 공간을 그리며 코펜하겐 실내 학파란 이름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빛이 가득한 공간, 따뜻한 색채, 가족들이 함께하는 일상의 풍경을 통해 따뜻한 휘게(Hygge)의 순간을 잡아내었던 다른 작가들에 비해 하메르스회이의 그림은 조금 더 어둡고, 고요하고 섬세하다.


하메르스회이의 그림에는 계속해서 같은 공간과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뒷모습(아내인 이다이거나 여동생인 안나이다.)이 등장한다. 

숨소리도 내지 않는 묘령의 여인이 조금씩 자세를 바꾸고, 문이 닫히거나 열리고, 시간대가 미묘하게 바뀐다. 

같은 공간을 섬세하고 미묘하게 변주하면서 사물 사이의 관계, 빛과 어둠의 관계, 공간과 시간의 관계를 화가는 예민하게 포착한다. 한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짚어가는 과정을 거치며 물리적 공간은 서서히 사라지고 공간에 배인 기척은 드러난다.


하메르스회이는 어두운 공간에 스며드는 적막을, 먼지의 밀도와 공허의 무게를, 수채화에서 물감이 퍼지듯 천천히 공간에 퍼지는 빛을 매우 집요하게 관찰하며 캔버스에 옮겼다. 

아무 소리도 안 날것 같은 진공의 공간. 소리도 빛도 멈춘 듯한, 또는 아주 천천히 흐르고 모이는 빈 공간. 차갑고 서늘한 초겨울, 또는 초봄의 공기, 희미하지만 따스하게 스며드는 햇빛, 길게 드리우는 그림자. 시간도 멈추고 소리도 멈춘 자리에 물감이 퍼지듯 서서히, 감정은 미세하게 번진다. 

바깥의 시간은 바뀔지 몰라도 하메르스회이의 공간에 고인 시간은 늘 새벽녘이나 황혼의 푸른 시간인 것 같다.


화면에는 늘 어딘가에 문이 있고, 창이 있다. 

그리고 창밖에는 밝고 환한 다른 이(異) 공간이 있다. 

캔버스 너머의 환한 공간과, 감상자가 속해 있는 선명한 현실의 공간 사이, 피안과 차안의 가장자리에 하메르스회이가 그려내는 푸른 시간의 공간이 있다.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그늘처럼 고여있다. 

고요하고 아득한 풍경 속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가 안개처럼 피어난다. 아스라한 푸른 경계가 춤추는 먼지 속에서 보일 듯, 안 보일 듯하다. 

만지려고 손을 뻗으면 화들짝 달아나는 먼지처럼, 닿을 듯 안 닿을 듯 거기 있다. 

Photo by Iuliu Illes from Upsplash


#그늘의 색: 없지만 없지 않은


회사에서 작품을 할 때마다 자주 사용해서 내가 우리 회사 트레이드마크 색이라고 부르는 회색이 있다. 포터스 페인트(Porter’s Paint)에서 나오는 우드스모크(Woodsmoke)란 색인데 오묘한 회색 빛이다. 언뜻 봤을 땐 청록의 기운이 어린 어두운 회색인데 빛에 따라 또 따뜻한 적토의 느낌이 든다. 주변의 색에 영향을 받아 밝아지기도, 어두워지기도, 따뜻해지기도, 차가워지기도 하는 이상한 회색이다. 


이 색을 볼 때마다 나는 가라앉아 침전된 그늘이 떠오른다. 그늘이 홀로 있으면 이런 색일까.  

그늘을 보면 아무 색도 없는데 모든 색이 다 숨어 있다. 오래 응시하고 있으면 그늘은 하나둘 자신을 수줍게 드러낸다. 

그 안엔 추운 공기의 푸른색도 있고, 강렬한 태양의 노란색도, 따뜻한 흙의 갈색도 있다. 나무의 그늘은 더더욱 색의 변화와 깊이가 다양한데, 바람이 불 때마다 산들거리는 잎사귀과 빛의 춤에 맞춰 그늘에 내려앉는 빛이 계속 변화하기 때문이다. 

은행나무, 단풍나무 등 잎사귀의 색이 분명한 나무일수록 대비가 강하고 반사되는 색도 많아 더 깊고 풍부한 그늘을 드리운다. 은행나무를 정자목이나 풍치수로 많이 심은 이유 중 하나도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Photo by Jonathan Larson from Upsplash

그늘의 공간감은 실체가 없이 깊고 풍부한 흔적, 기척으로만 만들어지기에 오묘하다. 

경계도 없고 형체가 없는데 어느새 나는 그 자리에 스며있다. 그늘 그 자체로는 부재(Absence)이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주변과 반응함으로써 태어나는 공간, 계속해서 변하는 없지만 없지 않은 색. 

투명하고 깊은 웅덩이가 그늘의 색이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색을 고를 때 주로 무채색을 고른다. 타임리스(timeless)하고 생활에 편안한 백드롭(backdrop)으로서의 건축을 추구하는데, 그러다 보니 유행을 타지 않는 무채색의 팔레트를 찾게 된다. 

그런데 사실 쉬울 것 같은 흰색, 회색, 검은색이 가장 고르기가 힘든 색이다.

흰색만 몇십 개의 샘플을 보고도 딱 맞는 색을 못 찾을 때가 있다. 흰색과 검정의 가운데 놓인 회색으로 오면 갈등은 더 심하다. 무채색은 색이 아니라 명암이기 때문에 주변의 환경에 따라 계속해서 자신을 바꾼다. 샘플을 이곳저곳으로 옮기고, 바닥에 놓고, 벽에 놓고, 빛 아래 놓고, 어둠에 놓고.. 그것도 모자라 결국 벽에 몇몇 옵션을 칠해 놓고 시간대에 따라 한참을 보다가 가장 편안한 색을 선택한다. 

그러다 보면 자주 우드스모크가 답이 될 때가 많다. 개인적 취향도 있겠지만, 결국 이 색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그만큼 이 색이 정체가 모호하고, 그러기에 주변의 모든 색을 끌어안아 주기 때문이다.


#그늘의 빛: 사라지지만 사라지지 않는


실내에 고인, 퍼지는, 머무는 그늘 (Resource: https://weheartit.com/entry/15854580)


“아름다움은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와 물체가 만들어내는 
그늘의 무늬, 명암에 있다.”
– 음예 예찬(In Praise of Shadows), 
다니자키 준이치로

음예라는 생소한 단어는 영어로는 Shadow로 번역되지만 사실 ‘그늘도 그림자도 아닌 어둑어둑하고 거무스름한 모습’을 뜻한다.


서양의 건축이 빛을 다루는 적극적인 모색을 보여준다면 동양의 건축은 음영을 다루는 세심한 변주를 보여준다. 

빛은 건물 안으로 바로 들어오지 않고 어두움의 통로를 지나 들어온다. 비와 여름의 햇빛과 비을 피하기 위해 드리운 긴 처마가 만드는 어둠,  첩첩의 문으로 둘러싸여 생기는 어두움을 지나 빛은 옆에서 비스듬히, 밑에서 반사되어 들어오기 때문에 희미하고 은근하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도 걸러서 들어온다. 유리대신 불투명한 창호지를 통해서 들어오는 분산된 빛은 그림자도 빛도 아닌 빛나는 웅덩이를 만든다. 그 안에는 흔들거리면서 꺼질듯 꺼지지 않는 촛대의 불이 일렁거리며 방 안을 비춘다. 웅덩이, 우물, 은근한 그늘의 공간이다.


그늘로 들어온 빛은 경계가 불분명하고 주위로 퍼져나가면서 다양한 빛과 어둠의 스펙트럼을 이끌어낸다.

밝음과 어둠의 중간이지만 정확히 반반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흔들리고 고이고 퍼지는 그늘의 공간. 그늘의 공간은 이렇게 유동적 (Fluid)이고 포용적이다.


이 곳에서는 여린 것들이 다치지 않고 자란다. 

스며들고 물들고 떠오르는 작고 여린 마음들, 물기어리고 촉촉한 가난한 마음이 이 곳에서는 숨을 쉰다.

시간과 흔적이 겹겹이 침잠된 묵직한 어둠. 그늘의 공간을 통과해 다정해지고 부드러워진 빛이 이 무거운 어둠에 닿을 때, 공간은 천천히 춤을 추면서 깨어난다. 

묵은 먼지가 걷히고 밑에서부터 쌓인 공간의 얼룩이 올라와, 감추지만 감추지 않고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가 드러난다. 그늘을 통해 드러나는 표면의 색 너머의 색, 형태 너머의 형태, 어둠 너머의 어둠, 빛 너머의 따뜻한 빛. 

그늘이 가리지만 그늘이 드러내는 세계를 바라본다. 

은근하고 희미해서 더 깊게 스며드는 운치, 풍취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창덕궁 실내에 고인 그늘

#서늘한 내면의 공간

 

심리학을 통해 미술 작품을 조망하면서 두 세계를 접목하는 책을 쓴 윤현희 작가는 저서 ‘미술의 마음’에서 하메르스회이의 작품을 다루며 ‘예민함’, ‘내향성’의 성격적 특징을 연결시킨다.

내향성이 정신적 에너지가 뻗어나가는 방향을 다루는 기제라면 예민함은 세상을 인식하고 정보 처리를 하는 인식의 깊이와 연결된다. 

작가는 책에서 캐나다의 심리학자, Elaine Aron이 정립한 ‘매우 예민한 사람’(Highly Sensitive Person, HSP)이라는 심리학 개념을 소개하면서 예민한 사람들이 가지는 성격적 특징과 예민함이 창의성과 만났을 때 피어나는 내면 세계의 깊이를 이야기한다.


일레인 아론에 따르면 HSP들은 D.O.E.S라고 요약되는 네가지 큰 성격적 특징을 보인다. (번역은 윤현희 작가의 번역을 따랐다. * 미술의 마음, ‘예민함이 만들어내는 창의성’ p255)


·         D is for Depth of Processing 

(대상과 현상을 생각하는 정보 처리의 깊이가 심오하다)

·         O is for Overstimulation

(과하게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

·         E is for Emotional Reactivity 

(타인의 비판에 민감하고 감정적이며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

·         S is for Sensing the Subtle 

(미세한 것에 민감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민한 사람들은 외부 자극에 신체적으로 민감할 뿐 아니라, 자극을 자신의 감성적인 내면의 예민함과 연결하고, 깊이 있는 정보 처리 능력을 통해 사물과 현상의 관계를 파악함으로서 전체적인 통찰을 얻어낸다는 것이다.


자극에 압도되지 않은 안전한 환경을 통해 예민한 사람들이 창의성을 발현할 수 있을 때, 그들 내부의 세계는 더 풍부해지고 깊어진다.

그늘의 공간은 이러한 섬세한 영혼들에 안전한 자리(retreat)를 마련해준다. 

외부와 내부의 경계에서 자아와 세상이 관계를 맺을 때, 양쪽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벗어나 잠깐 쉴 수 있는 곳, 서로 간에 안전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개인의 내적 질서를 다시 확립하고 재충전할 수 있는 조용한 쉼터. 그늘의 공간은 이러한 자리를 제공해준다. 

공간이면서 공간이 아닌 미묘한 공간, 반쯤 열린, 반쯤 어두운 이 곳은 그렇게 넉넉하다. 


때떄로 삶에도 이런 그늘이 필요하다. 

살면서 어둠에 빠져 동굴로 숨어들게 될 때도 있고, 반짝거리는 열정을 품고 질주하는 순간도 있지만 이런 진한 시간들은 계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양쪽의 간극을 메우면서 삶을 더 깊게 만들어주는 것은 서늘한 그늘의 시간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닿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열심히 애쓰면서 계속 꿈틀거리는 씨앗의 미세한 몸부림.

그늘의 공간과 고독의 시간을 채우는 건 그런 아스라한 미생의 것들이다.



#그늘의 깊이: 비어있지만 비어있지 않은


사라지는 아스라한 것들을 잠깐 잡았다가 다시 놓아준다. 

어둠으로 들어가 어둠을 응시할 때, 작은 촛불의 밝음이 보이고 촛불 아래 울먹이는 더 깊은 어두움도 보인다. 넉넉한 그늘은 모두에게 다 자리를 내어준다. 

주위의 시끄러운 것들을 끄고, 천천히 가라앉는 마음으로 가만히 응시해야 보이는 빛의 먼지. 천천히 침잠되는 먼지 같은 삶. 


그러나 먼지는 아주 작은 빛에도 다시 일어나 나풀 나풀 춤춘다.

하메르스회이가, 준이치로가, 로스코가 잡은 찰나의 빛, 무겁게 감정이 가라앉을수록 한층 깊어진 내면을 통해 연연히 떠오르는, 끝내 사라지지 않는 빛. 낮고 가난해서 더 넓게 안을 수 있는 다정한 마음.


내 마음의 그늘 위로 푸른 이끼가 자란다.


Photo by Roman Lupan from Upsplash



#참고자료 소개:

하메르스회이의 작품을 더 감상하시고 싶으시다면,

Vilhelm Hammershøi  (Google Art & Culture)

https://artsandculture.google.com/entity/m026cmhk


#더 나누고 싶은 것:

하메르스회이의 작품에 대한 심리학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미술의 마음"  (윤현희)

http://www.yes24.com/Product/Goods/102506455

(미술이라는 창을 통해 심리학의 이야기를 다루는 책입니다. 그림 속 빛을 따라가며 화가의 내면과 나의 내면의 빛을 찾는 이야기. 뒷표지에는 제가 쓴 추천글도 실려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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