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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라제 Aug 14. 2021

<광복절 특집> 공포가 아닌 역사로, "이코마 터널"

오브라제의 예쁜공포 이야기

안녕하세요.

오브라제 입니다.


오늘은 광복절 특집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일본 터널 괴담” 하면, 보통 ‘이누나키 터널’을 떠올리실 거예요. 일제강점기 시절, 이 터널을 만들기 위해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되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곳으로 알려져 있죠.



그런데 ‘이누나키 터널’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사실과 다릅니다. 실제로는 조선인이 동원되어 공사가 진행이 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현재로서는 진실을 말하기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이곳이 폐쇄된 이유가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 원혼들이  떠돌기 때문이 아니라, 1988년 비행 청소년들이 20대 남성 한 명을 강제로 차에 가두고 불태워 살해한 이후로도 범죄와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자, 새로운 이누나키 터널을 만들게 되었고, 그 후, 구 터널을 바로 폐쇄했다는 것입니다. (현재 이곳을 무단으로 들어가면 법 위반으로 처벌받습니다.)


그럼, 이누나키 터널 괴담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진짜 출처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이코마 터널’입니다.



이 터널은, 오사카 동부에 있는 히가시오사카시 와, 나라 현 북서부에 있는 이코마시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개통과 폐쇄가 반복이 되면서, 구 이코마 터널, 제1 신 이코마 터널, 제2 신 이코마 터널, 이렇게 총 3번 만들어졌는데, 최근에는 구 이코마 터널을 이용해 만든 제2 신 이코마 터널과, 제1 이코마 터널 일부만 비상용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은 우리가 짐작한 일들이 일어난 곳인데요,  모든 사건은 일본 정부가 오사카와 나라를 이어 줄 통로를 계획하면서 시작됩니다. 터널 작업은 전범 기업인 *오바야시구미에서 맡게 되었고, 그들은 공사를 위해 인부를 모집합니다. 아주 위험한 사실을 숨긴 채 말이죠…



( *오바야시구미 : 지금까지도 일본의 대형 기업 중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 준공과 구 제일은행을 건설한 곳입니다. 조선인 노동자를 학대, 학살한 것은 물론, 건설 현장에 조선 위안부를 데려오기도 하였습니다. - 위키백과 참고 )



그들이 건설하고자 했던 장소는 이코마 산이었습니다. 그곳은 지반이 너무 약해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곳이었고, 산을 뚫는다고 해도, 물이 어마어마하게 솟아 나오기 때문에 터널을 만들기에는 매우 부적합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바야시구미에게는 그것이 공사를 멈출 이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자국민이 아닌, 조선인을 데려와 시키려는 계획이었기 때문이죠.


1911년 6월, 아무것도 몰랐던 조선인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곳에 모집되어 공사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희망이 지옥으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조선인들이 작업을 하려고 들어간 순간,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막았고, 식사를 하루 한 끼 밖에 주지 않았는데, 그마저도 부실하였으며, 욕설과 폭행은 일상이었습니다. 밤에는 덮고 잘 것이 없어서 건축 자재를 몸 위에 올리고 쭈그린 상태에서 자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최악의 환경에서 일을 하던 와중에, 우려했던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1913년 1월 26일, 천장이 무너져 내려, 20여 명이 사망을 하고, 152명이 파묻혔습니다. 하지만 오바야시구미 측은, 구조하기는커녕, 살아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매장해 버렸죠.



이렇게 처참하고 부조리한 환경 속에서 계속 일했던 조선인들은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반발을 하였고, 오바야시구미는 자신들에게 반항하는 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호수에 끌고 간 뒤, 던져버렸습니다.


거기다가, “사람의 피가 많이 섞여야 잘 지어진다.”라는 말도 안 되는 속설로 인해, 그곳에서 감시 감독하던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참혹하게 학살한 후, 그 피를 터널에 뿌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조선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1914년  3월에 이코마 터널이 완공 되었고, 한 달 뒤인 4월 18일에 개통이 되었죠. 그곳은 일본 최초의 표준 궤간 터널이자, 일본 최고의 터널이라며 칭송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부터 이유 모를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 4월 16일 : 열차 화재로 인해, 승객 75명 부상, 28명 사망.


1947년 8월 19일 : 열차 폭발로 인해, 40여 명의 사람들 부상.


1948년 3월 31일 : 브레이크 고장으로 인해 앞에 정차해 있던 다른 열차와 충돌하여, 승객 282명 부상, 49명 사망.


(이 사건들의 아이러니 한 점은, 발화점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보수공사를 하려고 하면, 또다시 일어나는 원인 모를 사고들과, 저절로 써지는 한글 낙서들, 상투를 하고 한복을 입은 귀신을 보았다는 목격담,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자, 그곳은 귀신 터널 또는 유령 터널로 불리게 됩니다.



결국 1964년 7월에 일본 정부는 이코마 터널을 폐쇄합니다. 그리고 오바야시구미와 함께 입을 싹 닫고 증거를 인멸해 버리죠.


그리고 1964년에는 제1 신 이코마 터널, 1984년에는 제2 신 이코마 터널이 이어져 만들어지는 사이에, 인근에는 조선인들이 세운 절인 보덕사가 지어졌고, 그 안에는 1977년에 마을 주민들과 긴키 닛폰 철도가 희생자 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한국인 희생자 무연불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그렇게 잠잠해지는 것 같았던 이 아픈 기억들은 1992년 스미이 라는 일본인 여성 작가에 의해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녀가 이코마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집필한  “다리가 없는 강”에서, 과거 이코마 터널에는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있었고, 그곳에는 조선인들의 한이 남아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일본 정부는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며 주장하였지만 스미이 작가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조선인들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고 덧붙입니다.



거기에 역사학자들이 과거 아사히 신문에 실린, (1912년 9월 1일 - 이코마 터널에서 일을 하던 조선인이 도망을 갔다)라는 기사 내용을 찾아 조선인들이 징용되었다는 증거로 내세우기도 하고, 2000년 중반에는, 일본 정부의 잘못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영화감독 이즈츠 카즈유키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 박치기 (사와지리 에리카, 오다기리 죠 출연)에서 “실제로 이코마 터널을 뚫은 것이 누군지 아니?”라는 대사를 넣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국회의사당 대리석을 어디서 가져오고 누가 쌓았는지 아나?”라는 대사도 있음.)


하지만 일본 정부와 오바야시구미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코마 터널은 여전히 일본 대표 심령 스폿으로 꼽히지만, 반면에 한국인 희생자 무연불 위령비는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된 모습으로 남아있다고 전해집니다.



광복절인 만큼, 여러분들과 함께 이 분들을 기억하고 넋을 위로하기 위해 잠시동안 묵념을 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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