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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와 나,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

by 오리세상

나는 김치를 먹지 못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에게 김치는 공포의 냄새였고 역겨움 그 자체의 음식이었다.

어릴 적부터 김치를 못 먹었던 나는, 아빠만 만나면 늘 혼이 났다. 아빠는 김치를 입에 대지 못하는 나를 보며 “바보”, “멍청이”라며 무시했고, 그 말들은 오래도록 가슴에 박혔다. 그 당시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엄마와 잠시 떨어져 아빠, 아빠의 내연녀, 그리고 이복동생들과 함께 지내던 때였다. 어느 날 아빠는 가족들 앞에서 내가 김치를 먹지 못한다며 조롱했고, 이복동생은 “나는 이렇게 잘 먹는데, 언니는 왜 못 먹어? 언니 바보다, 바보!”라며 따라 웃었다. 아빠의 내연녀는 나의 편식을 고치겠다며 억지로 밥을 주지 않고 김치만 강제로 먹였고, 나는 울며 삼켰다가 토해내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모욕과 폭력을 퍼부었다.

그 후 다시 엄마와 살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엄마는 언제나 내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었고,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먹이지 않았다. 엄마 곁은 분명 안전했다. 하지만 그 안전함이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 또한 내 안에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김치는 내 삶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졌지만, 두려움의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치를 ‘혐오’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사춘기 특유의 반항심이 한창일 때였다. 엄마는 당시 남자친구가 있었고, 그분은 가끔 우리 집에 오셨다. 하지만 사춘기의 폭풍을 경험하고 있던 내겐 그 모습이 불편했고, 식사 준비 중인 엄마와 그분 뒤에다 나는 온갖 비난과 모욕적인 말을 쏟아냈다.

그 순간, 그분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내게 김치통을 던졌다. 김치가 머리 위로 쏟아지고, 나는 눈물과 김치 국물에 범벅이 된 채 “경찰에 신고하겠다!”라고 외쳐 댔다. 그분의 눈동자에 담긴 분노와 경멸, 그리고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표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이후 나는 ‘혼자’라고 느꼈고, 엄마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끝내 그 문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은 나를 더 깊은 외로움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엄마와 그분은 헤어졌지만, 내 안에 남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김치는 나에게 혐오의 상징이 되었다. 집에서 김장을 하거나 김치 냄새가 집 안에 가득 퍼지면, 나는 헛구역질을 하며 방으로 도망쳤다. 그러다 분노를 참지 못해 엄마에게 비난을 퍼붓기도 했고, 엄마가 가장 아파하는 부분을 일부러 더 찌르곤 했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엄마는 어느 순간부터 집에서 김치를 찾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엄마 나름의 미안함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내게 김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냄새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김치는 여전히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친구들과 밥을 먹을 때면 괜히 쿨한 척 “나 김치 못 먹어”라고 웃어넘겼지만, 속으론 위축되곤 했다. 그래도 이제는 나를 위해 바뀌고 싶었다. 김치를 먹지 못하는 내가, 어릴 적 그 조롱과 상처에 여전히 붙잡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씩 시도했다. 맵지 않게 볶은 김치부터 시작했다. 묵은지를 잘게 썰어 참기름에 볶아놓으면 김치 같지 않은 맛이 났고, 그걸로 김치볶음밥을 해먹기도 했다. 그렇게 김치를 ‘음식’으로 다시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여전히 생김치나 갓 담근 김치는 힘들었지만, 볶은 김치만큼은 괜찮았다.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극복해 갔다.

그러다 한식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김치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랑하듯 먹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그 모습조차 낯설고, 질투가 났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다니. 그는 내가 김치를 싫어하게 된 사연을 듣고 나서도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따뜻한 눈빛으로 “괜찮아.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라고 말해줬다.

이상하게도 그 말이 내 안에 있던 거부감을 조금씩 누그러뜨렸다. 김치를 강제로 먹으라고 한 사람이 아니라, 안 먹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참 위로가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 사람과 함께하는 식탁에서, 나는 다시 김치와 마주했다. 내가 먹을 수 있는 볶은 김치, 다음엔 김치찌개, 나중엔 묵은지도 한 젓가락.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의 혐오는 ‘이겨낸 상처’가 되어갔다. 김치는 이제 더 이상 트라우마의 상징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를 보듬은 증거이자 새로운 가족과 함께 쌓은 온기였다.


온 가족이 함께 모인 자리, 나는 무심히 김치에 젓가락을 뻗었다. 그 순간 엄마는 놀란 듯 눈이 동그래졌다.“오리야, 너 이제 김치 먹을 수 있어?” 엄마의 목소리에는 놀라움만이 아니라, 오래 기다려온 듯한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순간, 엄마의 눈빛 속에서 나는 과거의 어린 내가 위로받는 듯한 따스함을 느꼈다.
이제 김치는 더 이상 내 상처의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견뎌낸 시간, 그리고 엄마와 함께 다시 쌓아가는 성장의 증거였다. 엄마의 뿌듯한 미소와 나의 작은 용기가 만나, 비로소 우리는 같은 식탁 위에서 같은 맛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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