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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설 Oct 22. 2024

나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쓰는 사람, 쓰는 삶

여정(旅程) 

[명사] 여행의 과정이나 일정.


어쩌면 쓰는 사람, 쓰는 삶이 되어가는 그 여정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여정의 첫 발단은, 아니지 이 '쓰는 삶,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은  꽤나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마치 의식을 치르듯 밤이면 밤마다 일기를 쓰거나 일기장을 펼치지 못하는 날이면 책 한구석이에라도 메모를 휘갈기던 어린 시절이라든지 말이지. 


이렇게 혼자만 알고, 혼자만 간직하던 쓰는 삶이 지속되다가 언젠가에는 현실에 치여-굳이 시기를 더듬어 보면 아마도 대학교 4학년 고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던 시기부터 시작되어 각종 시험에 치솟는 스트레스를 쓰레기통에 버리듯 토해내는 혼자만의 글쓰기를 띄엄띄엄하다, 결국 이 혼자 쓰는 글쓰기에서 조차 도망치던 날이 계속돼버렸다. 이렇게 쓴들 무슨 소용이랴. 라는 회색빛 가득한 염세주의자의 출현이랄까. 


요 염세주의자의 출현과 함께, 

오랜 시간 그렇게 혼자 쓰는 삶조차 영위하지 못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다시 이제는 혼자 쓰는 사람, 삶이 아닌 쓰는 사람, 삶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다시 불타오르게 데엔 <Ways of Writers; 작가의 여정>이란 팝업을 다녀와서부터이다. 팝업을 통해서 여러 작가들의 여정을 보았는데- 그들의 의도는, 실제 정말 의도일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들과 나의 가장 차이는 그들은 쓰기 싫은 날조차도 썼다는 것이다. 참 신기하게도, 그들은 쓰고 싶은 순간에도 또 쓰기 싫은 순간에도 일단은 쓰고 보았다. 그러니까 일단 쓰고 보는 것, 그것이야 말로 쓰는 사람이 되고자 스스로에게 선언하는 행위이자 쓰는 삶으로의 나아감이었다. 


우선 나는 스스로에게 '쓰는 사람'이라는 페르소나를 부여해 보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렇다면,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두 번째 난관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일이었다. 

매일매일이 이렇게까지 버라이어티 하다고? 생각되는 현재 나의 일. 

하지만, 어디까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서 내 주관적인 관점 입장을 드러내기조차 조심스럽고 상당 부분 대외비적 일들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난감하기 그지없다. 

그뿐이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의 특성조차 어떨 땐 스스로가 상담교사 같기도 했다가, 어떤 순간엔 담임교사로서의 조각도 발견할 때도 있다. 또 어떨 땐 상담자로서 그들의 부모를, 아이들을 내밀하게 대할 때도 있다. 역할 간의 체인치가 참 순식간에 요구되기에, 이런 순간적 전환에 나 조차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젠. 


이전 직장에선 특정 이론의 기법을 접목한, 참 정체성이 분명한 상담을 했었다. 지금은? 그들이 하루하루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지 기반의 상담인건 분명 한데, 이걸 언어상담이라 말해야 할지, 그들의 삶을 점차 주체적으로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생활상담이라 해야 할지, 아직은 분명치가 않다. 뭔가 변종이 된 기분이라, 우선은 이 변종, 신종 같은 기분과 무드를 가지고 우선은 내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지? 란 질문을 끈질기게 물고 가보련다. 




그래서,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선물해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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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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