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은 백수, 직위는 실장입니다.
6년. 나름 내가 있었던 분야에서 꽤나 안정적이고 나름 범위가 있는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는 시간.
그 일을 갑자기 관두고 내게 가장 큰 도움이 되어주셨던 분은 공교롭게도 타 부처의 담당자분이셨다. 공무원 바닥 중에서도 전 부처가 한 번에 모일 경우는 꽤나 드문 일이라 어찌 보면 참 좁은 바닥에서 만나 뵙게 된 분이다.
한창 내가 사직을 할 즈음이 코로나-19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던 때라 더더욱 다 부처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활발해졌다. 그러면서 급속히 가까워지게 된 분이 바로 이 분이다.
조그만 일이라도 나에게 줄 수 있는 건수가 있으면 파트타임이라도 챙겨주시려고 했고, 이때까지의 경력과 능력, 그리고 기획력을 이대로 상처 속에 묻어버리기엔 너무 아깝다고 말하시며 사업자를 내고 일을 시작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셨다.
하지만 곧 죽어도 사업만큼은 안한다, 아니, 못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진 나에게 그 제안은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나에게 알음알음 일을 주시던 그분은 어떤 대표님을 소개해주시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숙한 행동이지만 뭘 하시던 분인지도 어떤 분인지도 모른 채 소개받게 된 대표님은' 너무너무 좋으신 분이시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 해보신 분이다'라는 정보를 빼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름 석 자빼곤 사실 아직도 무얼 하시는 분인지는 잘 모르겠다.
셋이 함께 소개 자리 겸 만나게 된 짧은 미팅에서는 앞으로 본인 부처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기회가 닿는 대로 '장이 들어설 때'마다 알려주시기로 했다. 그리고 아직 사업이 제대로 자리 잡질 않아 4대 보험 대신 프리랜서식으로 프로젝트마다 수익을 분배하는 구조로 진행하기로 근로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그 어떠한 사업도 따오지 못했고, 은근 나에게 영업을 기대하시는 듯했다. 하지만 넝마가 된 내가 영업을 하기는 어려웠고 그나마 받아온 사업은 이 모든 기회를 주선해준 부처가 맺은 계약 업체와의 재계약이었다.
4개월간 계약된 해당 사업은 매주 5개 국어로 해외 보도 데일리 모니터링, 스크 랩핑 및 분석 보고서 작성, 그리고 필요 때마다 급행이었다. 다른 업체들이 월 1,500만 원 안팎을 부를 때 300만 원은 앞으로 이뤄질 업무 양과 난이도에 비해 턱없는 가격으로 이루어진 계약이었다.
하지만 직원은 나 하나, 대외 직급만 실장인 나는 관리가 아닌 직접 5개 국어에 대한 모니터링, 스크 랩핑, 분석, 보고서까지 매주 만들어 내야 했다. 그리고 주어진 월급은 100만 원. 2/3을 바란 건 아니지만 최소한 나 혼자 해낸 일인 만큼 절 반의 역할은 해냈다고 생각했지만, 특수고용자의 계약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하는 일의 중요성과 난이도에 대해 보고를 드리며 은근슬쩍 급여에 대한 언급에 돌아온 피드백은 "열심히 하지 마세요."였다. 너무도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까지 하지 말고, 뭐가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러는 거예요? 시간 걸리는 부분 양 줄이고 대충 하세요. 일주일에 스무 시간 안 넘게 하시면 돼요. 번역도 그렇게까지 완성도 높게 하실 필요 없어요."
더군다나 나의 장황한 장문의 메일에 대표님은 새삼 놀라셨는지 연결을 해주셨던 분과 해당 건에 대해 이야기했던 듯하다. 정말 간만에 너무 바빴다며 연락이 왔다. 부처대 부처의 직원으로 이야기하던 때의 열정과 이 업무의 중요성을 모르는 부처들의 안타까움에 대한 컨센서스로 서로에게 신뢰를 쌓았던 그때의 그분은 없어진 채, 그분도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실장님 너무 힘 빼지 말고, 대충 해요. 그래도 100만 원 정도면 대표님이 많이 챙겨주신 것 같고... 제가 대표님께 실장님은 멀티가 다 된다고 자랑을 많이 했었거든요, 아마 대표님은 사람을 안 늘리고 실장님을 키울 요량이신 것 같아요"
저 통화 한 통화로 나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나 하나 갈아서, 적당한 직위와 함께, 노동청에 신고만 안 들어갈 수준으로 챙겨주고 나는 또 과다 업무와 스트레스에 파묻히겠구나.'
거기에 누락이 아닌 직접 모니터링을 하겠다고 하여 제외시킨 내용을 갑자기 최대한 빨리 보고서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에 외부라 30분은 소요가 된다고 하니 "너무 오래 걸리네요. 알아서 할게요"라며 5분 대기조 처럼 연락이 오기도 했고, 심지어 모니터링 업무 외에도 진행되었던 국문 50페이지에 달하는 국→영 문서 번역 건에 대한 비용 얘기는 증발해버린 채, 지금 하고 있는 것조차 "대충"하라는 말로 금방 끝난 통화는 모든 것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또 나는 이렇게, 내 시간과 내 가 그나마 경력과 그나마 할 수 있는 능력치들을 활용해서 경력이 끊기지 않게 하고 싶었고, 오히려 스타트업·사기업이라는 덜 경직되고 더 넓어진 시장에서 성장해 나가려던 헛된 꿈을 접게 되었다.
정부에 속고, 나와서 또 이렇게 속고. 이런 내가 바보인가? 천주쟁이긴 하다만, 삼재가 아니라 육재쯤 낀 걸까? 정말 나란 애는 어쩜 이렇게 한심하기 짝이 없을까? 그냥 더 열심히 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것 조차 욕심인 걸까?
더 이상 이 생각의 굴레에 갇혀 있을 수 없어 나는 계약서에 명시된 기간까지만 근무를 하겠다고 계약서대로 30일 전에 통보할 예정이다.
또다시 반년만에 이렇게 진짜 백수가 되어보려고 한다.
백수가 되려던건 아니었는데. 1년 만에 사직서 두 번 쓰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