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나스타시아 Nov 05. 2020

자살에 대하여

자살.


내가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의 첫 자살은 스물한 살 추운 겨울날, 나 홀로 마드리드에서 지낼 때였다. (물론 내가 소식을 들은 겨울보다 그 친구는 그 보다 훨씬 일찍 세상을 떠났다.)


멍하니. 터덜터덜. 20~30여분이 걸리는 거리의 어학원까지 걸어가 친한 언니와 선생님을 만나자마자 참고 참았던 울음이 터져 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다. 감사하게도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께 수업을 대신 진행해달라고 부탁한 뒤 두 시간 동안이나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너의 울음은 욕심일 수 있단다. 그 친구는 죽음으로써 더 편안해졌을 수도 있어. 그 친구의 죽음은 우리의 기준일 수 있단다. 마음껏 슬퍼하고 그리워해도 좋지만, 그 친구가 살아있었어야 한다는 욕심은 버리는 게 어떨까?"


그리고 얼마 후 나에게 예쁜 산타모자를 쓴 선인장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건 물이 부족하고 힘들어도 절대 죽지 않아."


교리 하나 제대로 모르지만 시키는 말은 잘 지키려 드는 가톨릭 신자인 나는 '자살'이 가장 큰 죄악이라 배웠기에, 그 친구가 그것 하나 빼면 정말 죄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은 친구인데, 괴로워서, '살고 싶어서' 자살을 택한 친구가 벌을 받는 게 조금은 가혹하지 않나요 하느님? 하고 여쭤본 적도 있다.


그 이후 (확실치는 않지만, 여러 심증으로 보았을 때) 사촌 오빠가 자살을 했다.

내가 꽤나 싫어하던 오빠였는데, 날 참 예뻐했지만 너무 짓궂어 어린 마음에 오빠를 참 미워했었다.

대학교에 가서도 가끔 오빠의 전화에 "못생긴 애라고 저장돼있길래 누군가 해서 전화했더니 너냐? 밥은 묵고 다니냐? 공부 같은 거 하지 말고 놀아라. 알았제?" 그런 말들이 그저 듣기가 싫어서 나중엔 오빠 번호를 차단했었다. 오빠 전화를 받았더라면 도움이 되었을까? 오빠는 띠동갑보다 더 어린 나에게 진심을 말해줬을까?


살려고 죽습니다.


참 아이러닉 한 말이지만, 내가 저 마음을 겪고 나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어떻게 해도 답이 없어서. 이게 그나마 최선일 것 같아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배웠지만,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끔찍해서, 도무지 보이지 않는 앞이 두렵고 지긋지긋해서. 여러 이유들이 죽고 싶단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또 쇼크성 생리통이 왔을 때. 너무 아파서 누울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어 바닥에 구부려 엎드려 아무 말조차 할 수 없을 때 힘껏 "그냥 죽이라고!!!!!!!!!!!!!!"라고 소리를 친 적이 있다. 육체의 고통 역시도 그런 생각으로 나를 이끌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너무도 겁이 많은 나는 죽지 '못해서' 아직 살아있다.


그리고 얼마 전, 다시 조금이라도 일어 서보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식을 얻고 사랑을 받고 싶어서 편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싶어서 대뜸 알지도 못하는 신부님을 찾아가 면담을 요청했다. "제가 다시 미사를 드리려면 제 죄를 고해야 되는데, 죽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고, 죽여달라는 게 지금으로썬 저의 가장 큰 죄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도무지 죄라고 진실로 고할 수가 없어서 찾아왔습니다. 너무 아파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부님은 일단 마음의 치료를 잘 받고, 어떤 이유에서든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때 느끼는 고통은 그 어떤 고통보다도 괴로울 거라고. 자살은 마귀의 속삭임이니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데, 그깟 네 꾐에 넘어가겠어?'라며 씩씩해지면 좋겠다며 함께 기도 해주셨다.


작년부터 참 여러 자살을 접하고 있다. 특히 엊그제 접한 개그맨 박지선 씨의 죽음은 고통 끝에 안락사 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린 결단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안쓰럽기만 하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남들에게 상처를 조금도 주지 않는 선한 웃음을 주던 사람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떠났다는 소식이,  직접 알지도 못하던 연예인이 그렇게 떠나갔다는 게 얼마나 오랜 시간 내 마음속에, 기억 속에 남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아픔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길. 이 곳에서 그 아픈 몸으로 다른 이들의 아픔을 달래주고 웃음을 주느라 너무 수고하셨다고. 그런 착한 사람이니 잘 굽어 살펴봐달라고 기도를 드린다.


故임세원 의사의 저서의 제목이 자살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문장이 아닐까 싶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손목이 부러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