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감사합니다
'도피성 석사'라는 말이 있었다. 요즘도 많이 쓰이는지는 모르겠지만, 2012~2014년 즈음,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취집'만큼이나 핫한 진로였다.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던 나는 어련히 GSIS(국제대학원) 입학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아이러닉 하게도 SOP(대학원 입학을 위한 학업계획서)를 쓰면서 온갖 '외국어'를 쓸법한 (글로벌, 인터내셔널, 상사, 해외라는 단어가 들어간 회사라고 보면 되겠다.) 대기업에는 모두 지원했다.
어찌 보면 외국어 쓰면서 시도 때도 없이 해외출장에 외국인 클라이언트와 쿨하게 커피 한 잔 손에 쥐고 일하는 그런 허례허식에 사로잡혀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국제기구만큼은 지금도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다. 전 세계가 본국의 국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에 앞서 천부인권을 위해 컨센서스를 도모하는 일. 그 평화를 위한 일에 작은 조각이 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멋진 일인가? 비록 그 결과나 과정이 말뿐이라 해도 '상징성'이 갖는 힘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코로나 백신 분배에 개도국이 소외되지 않도록 하자는 독일을 포함한 선진국의 선한 움직임의 논의가 이루어지는 이러한 역사의 순간을 보고 있는 것이 감격스럽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런 겉치레만 번드르르한 나에게 정신 차리라는 듯 단 한 곳도 빠짐없이 서류에서부터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학벌은 보잘것없어도 나름 5개 국어에 대외활동, 해외 경험이 있으니 서류 걱정은 하지도 않았던 나에겐 상당히 충격적인 결과였다. 되돌아보면 그 시절만큼 오만방자했을 때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저런 마음으로 쓴 학업계획서인들 진실로 '학구열'이 담겨있었을 리가 만무했고 대학원 역시 탈락했다.
그렇게 2014년 상반기의 시간을 허공에 날리며 지도교수님께서는 본인이 전공한 지역학을 공부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셨다. 다행히 프랑스 유학시절 생긴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역사 청산과 일본의 한국 식민역사 청산 비교에 관심을 가졌던 터라 교수님의 제안을 감사히 받았다. 교수님은 뽑히면 연구소 자리며, 연구할 지역까지도 모두 신경을 써주셨다. 합격 후에는 국제 포럼에 따로 불러 해당 대학원 학과장님께 직접 내 손을 잡고 가셔서 "우리 학생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신교수님.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고개를 숙이셨다.
그렇게 감사한 합격의 순간을 맛보며 인턴 생활을 즐겁게 해 나가던 그때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나에게 과분한 학교, 장학금, 교수님의 은혜와 다시 잡기 힘들지도 모를 일의 기회 사이의 선택. 처음에는 서너 번에 걸친 회사분들의 제안을 고민도 않고 거절했다.
그런 나를 돌려세운 것은 함께 인턴을 하던 친구의 한 마디였다.
"언니 이런 일 하려고 대학원 가려는 거 아니었어요?"
그랬다, 나만의 콘텐츠가 없이 학업을 이어가면 나는 국제기구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절대 포기가 아니다. 나의 커리어를 구축하면서 나에게 꼭 필요한 공부를 훗날 하고 말 거야.'
그렇게 모진 마음을 먹고 입사 시험을 치르고 합격을 했다. 회사의 배려로 근무시간을 쪼개어 지도 교수님을 찾아가 전후 사정을 설명드리고 입학 예정이던 대학원의 학과장님께도 찾아가 죄송하다는 인사를 드렸다.
지도 교수님께서는
서운함은 잠시야, 너의 길을 잘 가면 그게 내 기쁨이야
라는 아빠의 마음으로 나의 길을 응원해주셨다. 마치 입사라는 웨딩식에 함께 손을 잡고 들어가 주시며 응원을 받는 기분이었다.
나의 사랑은 그렇게 축하를 받으며 시작되었다.
PS. 평생 아버지 같은 윤 교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