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이름을 묻다 Ⅲ

식물명에도 성씨가 있을까?

by 이른아침

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봄이면 도심의 길가나 공원, 주변의 들과 산은 물론 깊은 계곡과 높은 산 어디서든 마주칠 수 있어 친숙한 풀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제비꽃이 40여 종에 이를 만큼 다양하고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까지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설령 그런 사실을 알더라도 제비꽃 이름을 열 가지 이상 말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기본종인 제비꽃을 시작으로 흰제비꽃, 노랑제비꽃, 고깔제비꽃, 알록제비꽃, 뫼제비꽃, 서울제비꽃, 남산제비꽃, 털제비꽃까지 어렵게 꼽아보아도 아홉 개다. 하나만 더 보태면 열 개인데 더 떠올려 고개를 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제비꽃의 이름을 좀 더 쉽게 기억하는 방법이 있다. 제비꽃 이름에 숨겨진 공통된 틀을 이해하는 것이다. 모든 제비꽃의 이름은 ‘제비꽃’이라는 어근 앞에 저마다 특징을 담은 ‘○○’이라는 접두어를 규칙적으로 덧붙이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이 접두어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고 연상하면 제비꽃 이름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에서 생각해 낸 제비꽃들의 접두어가 갖는 의미를 알아보자. 흰제비꽃과 노랑제비꽃은 꽃의 색깔을, 고깔제비꽃은 새잎이 올라올 때 고깔처럼 말린 형태를, 알록제비꽃은 잎 표면의 알록달록 무늬를, 뫼제비꽃은 주로 자라는 터전인 산을, 남산제비꽃과 서울제비꽃은 처음 발견된 지역을, 털제비꽃은 잎과 줄기에 난 털을 이름 앞에 붙였다.


제비꽃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식물명 앞에 붙는 접두어는 꽃의 색깔, 잎의 형태, 발견지나 서식처 그리고 외형 같은 해당 식물이 갖는 생태적 특성을 담고 있다. 동시에 닮은 식물을 비교하고 구분하는 실마리가 된다. 이제 이름 속에 숨겨진 이 흥미로운 암호를 풀 듯 식물 이름에 자주 쓰이는 대표적인 접두어들을 의미와 유형별로 분류해 정리해 보자.


서식지와 발견 지역 : 자라는 장소에 따라 벌, 두메, 바위, 산(뫼), 물, 갯, 섬 같은 말이 붙는다. 금강, 지리(산), 한라처럼 산 이름이나 서울, 부산 같은 지명은 처음 발견된 지역이거나 서식지를 가리킨다.

크기와 형상 : 동종보다 작고 앙증맞으면 좀, 왜, 꼬마, 쇠, 콩, 애기, 각시 등을 활용하고, 크면 왕, 큰을 붙인다. 잎의 모양에 따라 둥근, 가는, 긴, 좁은, 넓은, 가새(가위처럼 갈라진), 알록 등이 쓰인다.

색깔 : 꽃이나 잎, 열매의 색에 따라 흰(백, 은), 검정(검, 검은), 노랑(금, 누른), 붉은, 분홍, 자주, 청 등으로 나타낸다.

털과 가시 : 털의 유무나 형태에 따라 털, 잔털, 솜, 민(민둥) 등을 붙여 구분하고, 가시가 돋으면 가시를 붙여 강조한다.

생장 형태 : 자라는 모습에 따라 땅에 누운 듯 자라면 눈(누운), 고개를 숙이면 숙은, 곧게 서면 선, 땅바닥에 붙어 자라면 땅(땃) 같은 말이 형용사처럼 붙인다.

유사성 : 본디의 성질을 잘 갖춘 경우에 참을,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로 개나 가를, 그리고 종은 다르지만 서로 닮았다는 뜻으로 나도, 너도를 사용하여 구분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식물과 비슷하나 같은 식물은 아니라는 의미를 나타낼 경우, 이름 끝에 아저씨의 고유어인 아재비를 붙여 부른다.


이렇듯 접두어에는 식물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력과 특징이 함축해 담겨있다. 그런 의미에서 접두어는 사람 이름 앞에 붙는 성씨와 비슷한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때로는 제비꽃처럼 같은 집안 식구들을 구별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종이면서도 겉모습과 서식지가 닮았다는 이유로 같은 접두어를 나눠 갖기도 한다. 그래서 접두어가 생물학적 유전적 계통이나 유연관계를 밝히는 엄격한 의미의 성씨라기보다 식물을 부를 때 먼저 떠올리는 외형적 특징이나 출신지를 나타내는 관찰의 언어에 가깝다.


어쨌든 식물 이름 앞에 붙는 접두어는 한두 글자에 지나지 않으나 그 짧음 속에는 식물이 견뎌온 지난한 삶과 시간을 관통하는 특징을 담고 있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산과 들을 누비며 풀잎 한 장, 나뭇가지 한 개조차 허투루 넘기지 않고 남긴 기록이자 생명을 향한 다정한 눈길이다.


이제 접두어라는 지도를 손에 넣었으니 아홉 고개에서 멈췄던 제비꽃 이름 찾기를 다시 시작해 보자. 고개 너머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다음 제비꽃은 누가 될까?



<제비꽃> <흰제비꽃> <노랑제비꽃>
<고깔제비꽃> <알록제비꽃> <뫼제비꽃>
<서울제비꽃> <남산제비꽃> <털제비꽃>

* 제비꽃은 자기들끼리 서로 섞이기도 잘하고(교잡) 생김새의 변화가 심한(변이) 편이라 딱부러지게 이름을 불러주기 어렵습니다. 제가 부른 이름이 다소 어긋나더라도 제비꽃 이름을 소개하는 글이니 너그럽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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