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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아침 Jun 21. 2024

[서문] 텃밭, 실패 목록에서 핀 꽃

작물에서 피는 꽃, 마음과 입맛을 사로잡다

텃밭을 가꾸기로 했다. 직접 기른 싱싱한 채소를 먹고 싶었고 시골 출신이라 어렵지 않게 농사를 지을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으면 처음에는 어느 정도까지 자라지만 먹을 만큼 충분히 키우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먹을 생각에 앞서 몸을 제법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고, 시골에 살면서 부모님 농사일을 도운 것이 농사를 지은 경험은 아니었다. 할수록 실패 목록이 늘었다.


텃밭을 시작한 첫해에 상추는 씨앗을 뿌린 대로 새싹이 돋았고 성큼 자라서 몇 번 뜯어먹었다. 열무도 잘 자라다 벌레에 먹히긴 했어도 웬만큼 수확하였다. 농사가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봄 한 철뿐이었다. 장마가 지나고 한여름이 오자 채소는 녹아 없어지고 풀은 손쓸 틈도 없이 삽시간에 밭을 점령해 버렸다. 이렇게 첫해 텃밭 가꾸기는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끝났다.


다음 해에는 오이와 방울토마토를 추가로 심었다. 옆 텃밭에서 길쭉하게 자라는 오이가 먹음직스러웠고 어릴 적에 몰래 따먹던 어린 오이의 떫은맛이 생각났으며, 빨갛게 익어가는 방울토마토를 그 자리에서 따먹고 싶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처음 몇 개뿐이었다. 줄기를 솎아 잘라줄지 몰라 줄기만 뻗고 더 열리지 못했고 무슨 연유인지 잎이 노랗게 변하면서 제대로 크지 못하고 땅에 주저앉았다.


그다음엔 실패할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고구마와 호박을 심었다. 고구마는 처음 옮겨 심었을 때는 살아날까 싶었으나 자리를 잡으니 오히려 장마와 뜨거운 햇살에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며 덩굴을 뻗었다. 그러나 남의 밭에선 순을 무섭게 뻗던 호박은 내 텃밭에서는 호박 하나 열리지 않을 정도로 비실댔다. 거름이 부족했다.


경험이 쌓이며 겨울을 나는 작물인 마늘, 양파, 쪽파를 가을에 심었다. 겨울나기를 해보았으나 일찍 그늘지고 찬바람이 거센 언덕이라 신통치 않았다. 볏짚이나 나뭇잎으로 덮어 보온을 해주어야 했다. 땅을 파고 저장한 무를 제대로 묻지 못해 얼어버린 일, 울타리가 허술해 고라니 피해를 고스란히 본 일, 2년 차에 옮겨 심지 않아 왜당귀 뿌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 해가 갈수록 조금씩 나아진다고 하나 성공보다는 실패한 목록이 여전히 더 많다. 그래도 5평 남짓한 작은 땅이라도 해가 거듭되고 경험이 쌓이자 여유가 생기며 먹을 생각을 넘어 다른 것을 보게 되었다.


문득 감동의 순간이 찾아왔다. 싱싱한 고추가 먹고 싶었다. 오래전 어쩌다 부모님 농사일을 도우러 시골에 가서 점심으로 먹던 맛이 그리웠다. 밥을 물에 말고 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으면 더위와 피로가 가셨고 바람이 이는 마루에서 낮잠을 부르던 맛이었다.


마침 소나기가 그치고 바람과 함께 먹구름이 물러갔다. 텃밭에 가니 풋고추에 빗물이 맺혀 더 싱싱하게 보였다. 고추를 따는 순간 고춧대가 흔들리면서 빗물이 떨어졌다. 손에 떨어진 물을 털어내려던 순간 꽃잎이 손에 매달렸다. 빗물을 머금은 하얀 꽃이 눈에 들어왔다. 돌아오는 길에서도 밥상을 앞에 두고서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떠올랐다. 마침내 마음을 사로잡혔다. 이후로 텃밭에 가면 꽃을 찾아보게 되었다.


작물에도 꽃이 피고 있었다. 곁에서 꽃이 피고 졌는데도 나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 빗방울이 맺힌 고추꽃은 그동안 먹을 생각만으로 텃밭에 다녔던 발걸음을 되돌아보게 했다. 상추나 시금치 같이 잎을 먹는 채소도 뽑아버리지 않고 일부러 한두 포기를 남겨 두기로 했다. 그리고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꽃을 보며 텃밭에 더 오래 머물렀고 꽃을 보고 오면 밥맛도 좋았다. 입맛을 돌게 했던 작물에서 핀 소소한 꽃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텃밭에서 꽃 피는 이야기가 한 사람이라도 입맛 나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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