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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아침 Jul 19. 2024

시금치, 올해도 실패다

실패 덕분에 시금치꽃을 보았으나 다 보지는 못했다

시금치는 텃밭 경작에서 실패 목록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 지금껏 제대로 키워본 기억이 별로 없다. 재배 방법을 잘 몰랐거나 품종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했고 게을러서 시기를 놓치기도 했다. 시금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모두 내 탓이었다.

          

농협에서 사은품으로 준 씨앗이 있어서 파종했다. 씨를 뿌리고 상당 기간이 지났는데도 드문드문 싹이 돋았다. 처음엔 씨를 너무 깊게 심은 탓으로 여겼다. 씨앗 봉지 겉면에 포장 연도와 발아보증기한이 인쇄된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심은 씨앗은 발아보증기한이 1년인데 무려 3년이나 지나있었다.

          

다음 해에는 물을 묻힌 솜 위에 이틀 정도 놓아두어 씨앗이 깨어나도록 했다. 시금치 씨앗은 껍질이 두꺼워 이렇게 하면 발아도 빠르고 발아율도 높다는 조언에 따랐다. 새로운 씨앗 덕분인지 발아 유도 덕분인지 새싹이 잘 돋아났다. 다른 식물과 달리 창처럼 기다란 모양의 떡잎 2장이 나왔고 며칠 지난 후에 떡잎 사이에서 본잎이 나오는데 비로소 익히 알던 시금치 잎 모양이다.

          

어느 정도 자라니 너무 촘촘했다. 지난해 발아가 부진했던 기억 때문에 씨앗을 너무 많이 뿌린 탓이다. 군데군데 골라 솎았다. 충분한 간격을 두어야 하는데 아까워 그러지 못했고, 솎아내기도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식물이 자라는 속도에 맞춰 두세 번은 해야 했다. 그동안 줄뿌리기로 씨앗을 뿌렸는데 솎아낼 여유가 없다면 점뿌리기를 해도 좋겠다.  


그해 가을에 또 파종했다. 봄 시금치 농사를 만회하고 싶었고 겨울을 나는 모습도 궁금했으며  좋아하는 김밥에 직접 기른 시금치를 맘껏 넣고 싶었다. 발아는 어느 정도 되었으나 제대로 크지 않았고 추워지자 견디지 못해 시들어갔다. 지난봄에 파종하고 남은 씨앗을 파종한 실수였다.

    

 시금치는 동양종과 서양종이 있고 추위를 견디는 힘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내한성이 약한 서양종은 봄에 종자를 심고, 가을에는 추위에 강한 동양종을 파종해야 한다. 동양종은 씨앗이 둥근 서양종과 달리 가시처럼 생긴 돌기 2개가 있어 서로 모양이 달라 쉽게 구분된다. 동양종은 겨울 추위를 견디기 위해 당분 함량을 높이므로 단맛이 더해져 한층 맛있다.

* 겨울 시금치가 맛있는 이유 :  겨울을 견뎌내 봄 (brunch.co.kr)


올봄에도 시금치 씨앗을 뿌렸다. 냉장고에 냉장 보관했고 발아보증기한 내에 있는 씨앗이라 발아도 잘 되었고 솎아내기도 넉넉하게 했다. 그런데 성장이 더뎠다. 시금치는 생육기간이 짧아 급속히 발육하므로 밑거름이 충분해야 했다. 크지 않더라도 다음 주엔 수확하려 마음먹고 돌아와 1주일 후에 갔더니 어느새 꽃줄기가 올라와 있었다. 꽃줄기가 올라오기 전에 충분히 자랄 수 있도록 파종 시기가 더 빨라야 했다. 시금치는 낮시간이 길어지는 시기에 맞추어 꽃을 피우는 장일(長日) 식물이기 때문에 개체 크기에 상관없이 일정 시기가 되면 꽃이 핀다.


올해도 시금치 농사는 실패다. 밑거름이 부족했고 파종이 늦어서 제대로 크지 않았다. 먹을 만큼 크지도 않았는데 자연의 시간에 따라 한꺼번에 꽃줄기가 올라왔다. 시금치꽃을 보고 싶었는데 잘된 일이라 생각하며 위안했다. 기다리던 꽃이 피었다. 꽃잎은 없었으며 길고 투명한 암술대가 여러 갈래로 뻗어 나온 단순한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와 찍어온 사진을 확대해 가며 확인했다. 모두 긴 암술만 있었고 수술을 찾을 수 없었다. 도감과 책을 찾아보았다. 시금치는 풍매화였고 암수딴그루란다. 풍매화라서 곤충을 유인할 꽃잎 같은 겉모양을 꾸미는데 양분을 쓸 필요 없다. 그래서 암꽃에 꽃잎은 없고 암술만 있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본 꽃은 암그루에서 핀 암꽃이었다.

 

수꽃은 황록색의 꽃잎(꽃덮이조각) 4장과 노란 수술 4개가 있다는데 이런 모양을 한 수꽃이 핀 수그루는 사진에도 없었고 다시 밭에 가서 확인해도 없었다. 왜 내 텃밭에는 모두 암그루만 있는지 궁금하다. 시금치 씨앗에 암수가 따로 있지 않고 본잎이 나올 때쯤 낮길이와 온도 등 자연조건에 따라 암수가 결정되고, 일반적인 암수비율이 1:1 정도라는데 말이다.


이후로도 밭에 갈 때마다 유심히 관찰했는데 수꽃처럼 보이는 꽃은 찾을 수 없었다. 6월에 접어들고 더워지자 암술은 시들어가고 씨방이 제법 통통하게 굵어졌으나 끝내 여물지 못하고 쭉정이가 되었다. 수정하지 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씨앗을 맺지 못하도록 육종 된 것인지 모르겠다. 내 관찰이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물론 있다.


지금까지 시금치를 재배하면서 여러 실패가 있었다. 또한 텃밭에서 흔히 기르는 농작물인데도 토란이나 생강처럼 지금껏 꽃을 보지도 못했고 꽃이 어떤 모양인지도 몰랐던 작물이라 좀 특별했다. 작물에서 피는 꽃에 대해 글을 쓰려고 마음먹고도 시금치꽃을 인터넷에서 먼저 찾아보지 않기로 했다. 첫 대면은 사진이 아닌 밭에서 만나고 싶었다. 올해 암꽃은 보았으나 여전히 수꽃은 직접 보지 못했다. 내년을 기다려야 할 이유이고 내년에도 살아 있어야 할 이유다.

<시금치 성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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