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에 대한 기억 두 개가 있다. 그 시절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허기를 채우는데 밥만으로 모자라 여름에는 감자, 겨울에는 고구마를 먹었다. 학교에 다녀오거나 놀다 들어와 먹던 간식이었고 때론 끼니였다. 보통 밥할 때 쌀 위에 올려놓고 쪘다. 그러면 감자에 밥알이 붙어 있었고 그 밥알을 떼어먹는 재미도 있었다.
하나는 개인적인 기억이다. 입대하여 받은 군화가 작아서 발가락 윗부분 피부가 벗겨졌는데, 신병이라 치료를 제대로 받지도 신발을 바꾸지도 못해 만성이 되었다. 휴가 때 어머니께서 생감자를 갈아 발가락에 싸매주셨다. 이틀 정도였지만 신기하게 어느새 아물었고 재발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감자가 염증 완화에 도움이 되는 걸 알았고 지금도 위염이 생길 때면 생감자를 갈아먹으면 아주 효과적이다. 감자를 먹거나 흉터진 발가락을 보면 자꾸 엄마 생각이 난다.
작물은 야생종을 길들여 순화하여 최초 발생한 원산지에서 필요에 따라 여러 지역으로 점차 전파해 나가는 과정을 거친다. 작물의 전파 경로와 과정에 대해 재배지마다 작물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고 때로 극적이기도 하다.
감자의 원산지는 안데스산맥 고원지대이며 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 초기에는 유럽에서 최음제로 오인되거나 울퉁불퉁한 생김새와 씨앗 없이도 덩이줄기로 번식하는 특성 때문에 악마의 식물이라며 배척받았다. 감자에 대한 편견이 누그러지고 보급에 우여곡절이 있어도 경작이 쉽고 탄수화물이 풍부해 유럽의 식량난을 해결한 중요 작물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을 거쳐 들어왔는데, 실학자 이규경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1824~25년, 명천의 김 씨가 북쪽에서 가지고 왔다는 설, 청나라 사람이 인삼을 몰래 캐가려고 조선에 들어왔다가 떨어뜨리고 갔다는 설”<채소의 인문학, 190쪽>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감자는 이렇게 여러 나라에서 식량자원으로서 중요성, 재배의 용이성, 영양소의 적절성 등으로 세계 곳곳에 재배하지 않는 곳이 드물다. 또한 다양한 요리도 가능하여 지금은 영양뿐 아니라 맛으로도 사랑받아 벼, 밀, 옥수수와 함께 세계 4대 작물이다.
이렇게세계인이 사랑하는 작물이고 다양한 요리가 가능해서 나도 텃밭을 가꾼 이래로 거의 매해 감자를 심었다. 첫해에는 거름도 충분치 않고 꽃을 따주지 않아 씨알이 작고 북을 하지 않아 파랗게 변한 것 이외에 지금껏 병치래도 적고 수확량도 그럭저럭 나오고 큰 실패는 없었다.
5월 말경에 땅속에서는 기는줄기에 감자가 생기고 땅 위에서는 꽃이 피기 시작한다. 감자꽃은 작은모임꽃차례로 피어 꽃자루 끝부분에 여러 꽃이 뭉쳐있어 마치 꽃다발처럼 보이게 하는 전략으로 곤충을 불러 모은다.
꽃차례(花序)는 꽃자루에 꽃이 달리는 모양 또는 꽃이 붙는 줄기 부분 전체를 말하며 식물 종마다 일정한 형태를 가진다. 충매화는 효과적으로 곤충의 눈에 잘 띄고 잘 내려앉을 수 있게 꽃을 배열하고 풍매화는 바람에 잘 흔들려 꽃가루가 잘 날리게 배열한다.작은모임꽃차례(취산화서)는 먼저 꽃자루 끝에 한 개의 꽃이 피고, 그 꽃 밑에서 나온 한 쌍의 꽃자루 끝에 꽃이 피고, 또 꽃 밑에서 한 쌍의 꽃자루가 나와 꽃이 차례로 핀다.
꽃잎은 밑동 부분이 붙어 있고 끝으로 갈수록 퍼져나가 마치 깔때기 모양이며 끝부분이 뾰쪽한 오각별 모양이다. 이렇게 꽃잎이 붙어 있으면 통꽃이고 장미처럼 꽃잎이 하나씩 갈라져 있으면 갈래꽃이라 한다. 꽃 빛깔은 감자 색깔에 따라 다르다. 나는 하얀 감자꽃이 더 좋다. 하얀 감자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화려함이 아니라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풋내와 함께 알싸한 향도 느껴진다.
사람들은 감자꽃을 보면 서럽고 서글프다고들 한다. 배고픈 기억 때문일까? 굵은 감자를 얻으려 꽃을 따내는 안타까움인가? 아무튼 꽃대를 꺾으려면 망설여지고어릴 적 감자꽃의 아련한 기억을 도려내는 듯해서 마음도아리다. 내 텃밭에서는 매년 달걀 만한 감자밖에 없으니 꽃을 따도 씨알이 굵어진다는 믿음도 굳지 않다.그러니 내년에는 꽃자루 꺾기를 최소화하고 토마토처럼 생겼다는 열매가 맺도록 기다려 봐야겠다.
감자를 캤다. 땅에 감자를 묻고 싹이 나서 물을 주고 꽃이 피고 줄기가 노랗게 시들 때까지 내 상상력을 자극했던 감자였다. 땅속에서 감자가 언제, 얼마나 달리고 굵어지는지 궁금했다. 마음으로 그리던 감자보다 적고 작았다. 그래도됐다.엄마를 그리워했으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