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기획자의 비IT기획
취직하기 전 소설 쓰기라는 취미가 있었다. 자소서 취미란에 당당히 글쓰기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소설 쓰기를 좋아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소설 쓰기는 내게 많은 즐거움을 주었는데 최근에 문득 그때의 감정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예전에 썼던 소설을 인쇄하여 다시 읽어봤다.
어떻게 이 정도 길이의 소설을 썼지? 글을 다시 읽어보며 참 신기했다. 지금 다시 쓰라면 절대 쓰지 못할 분량이었다. 예전의 나는 참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오랜 기간이 지나고 다시 읽어서인지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오그라드는 부분은 물론 고치고 싶은 부분도 눈에 많이 띄었다.
조금 고쳐볼까? 욕심이 나서 하나둘 손을 댔다. 그리고 어느새 정신차려보니 독립 출판 클래스까지 등록하고 있었다. 기왕 건든 거 잘 다듬어서 출판까지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스토리지북앤필름에서 하는 독립 출판 4주 클래스를 들었다. 수업 내용도 좋았고 함께한 분들에게 동기부여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또 운좋게 회사 동기 디자이너의 도움도 받게 되었다. 책의 전반적인 디자인을 해줬는데 결과물이 정말 잘 나왔다.
(디자이너 친구 덕분에 내 책이 라면 받침으로 쓰일 일은 없을 것 같다.)
타고난 인복 덕분에 내 독립 출판 계획은 빠르게 진행되어 7월 14일에 책이 출간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사람들에게 구매 접수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글 맨 아래에 독립 출판 책 소개 및 구매 접수 링크가 있어요!)
빠르게 달려온 만큼 정신없기도 했는데 돌아보니 참 느끼고 배운 점들이 많았다. 특히 IT 기획자로서 느끼고 배운 점들이 좀 있었는데 기억나는 대로 정리해두려 한다.
IT 서비스 기획자는 보통 웹/앱 서비스와 같은 '소프트웨어'를 만든다. 그래서 책이라는 '하드웨어'를 만들게 되어 설레는 마음이 컸다.
왜냐면 결과물을 내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만들며 들인 시간과 노력은 직접 느낄 수 있는 책의 두께로 치환된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책을 만드는 것에서 오는 보람이 더 풍부해보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완성된 책을 품 안에 안았을 때 마음이 참 포근해졌다.
그런데 그런 포근함은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책을 만들며 하드웨어 제작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가장 어려웠던 것은 시제품 만들기였다. 비교적 쉽게 시제품을 만들어볼 수 있는 웹/앱 서비스와 달리 책은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어갔다.
컴퓨터로 책의 표지 및 내지 작업을 완료한 후 테스트로 책을 소량 뽑아보는 것을 가제본이라 하는데.. 소프트웨어로 치면 알파/베타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가제본을 통해 작업한 내용이 어떻게 나오는지 확인하는데.. 매체가 컴퓨터 화면에서 종이로 바뀌는 만큼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올 때가 꽤 생긴다.
그래서 나는 가제본을 네 차례 정도 했다. 종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표지 수정이 필요해서, 내지 여백을 바꿔서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가제본 한번 당 약 이만원 정도의 비용이 나간다는 것이었다. 가제본 비용만으로 10만원은 넘게 썼다.
또 가제본 된 책을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보통 3일 정도라 수정된 것을 확인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수정 내용이 곧바로 반영되는 웹/앱 서비스와 비교되어 조금 답답했다.
이런 금전적, 시간적 비용이 들지 않았다면 사실 훨씬 더 많이 수정을 했을 것 같다. 왜냐면 책은 웹/앱 서비스와 달리 배포 후엔 수정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결국 책은 웹/앱 서비스보다 잦은 수정이 필요하지만 그렇게 하기 어려운 제품인 셈이다. 그래서 한번 작업할 때 최대한 꼼꼼할 필요가 있었다.
그다음으로 어려웠던 것은 재고 문제였다. 책을 만들며 처음으로 재고에 대한 고민을 해봤는데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냥 딱 팔릴 정도로만 인쇄하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단가라는 게 있었다. 많이 인쇄하면 할수록 책의 생산 비용이 낮아진다는 것.
인쇄소의 얘기를 들어보니 500부를 뽑는 것과 1000부를 뽑는 것의 가격 차이가 20만원도 나지 않았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종이, 잉크 등 재료 비용보다는 출판 초기 세팅을 하는 비용이 더 나가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보니 적게 뽑으려고 생각했던 마음도 흔들렸다. 가격 차이도 얼마 안 나면 한번 찍어내는 김에 많이 찍어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데 많이 찍어냈다가 거의 못 팔면 재고는 그대로 짐짝 신세가 될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좁은 집에 수많은 책들까지 들어선다는 생각을 하니 두려웠다.
결국 두고두고 팔 생각으로 500부 인쇄를 계약하긴 했지만 사실 잘한 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번 결정은 1년 뒤에 다시 와서 평가해볼 예정이다.
시제품 제작의 어려움 그리고 재고 문제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내가 언제 이런 고민을 해보겠냐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계속 웹/앱 서비스만 보고 있었다면 경험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짧지 않은 인생 언젠가 다른 업계의 기획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을 텐데 미리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도 여러 차례 도전해보며 하나씩 부딪혀가야지.
독립 출판 클래스를 들으며 이 세상에 의미 없는 책은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하는 말씀이었다.
나 같은 게 책을 만들어도 될까하며 의기소침해질 때가 있는데 선생님의 격려 덕분에 동기부여가 되었다. 어쨌든 나한테라도 의미 있는 건 맞으니까!
하지만 책을 조금이라도 팔 생각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나의 책이 소비자들에게도 의미있게 다가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일반 소비자 입장에선 독립 출판된 책은 보증되지 않은 상품이다. 이성적으로 봤을 땐 편집자들이 검증하여 만든 기성 출판 책을 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래서 보통 독립 출판 초기엔 지인 판매가 많은 것으로 보였다. 나 또한 인플루언서가 아니기에 그럴 것이고..
독립 출판을 한 입장에선 책을 구매해준 지인들에게 참 감사하다. 어쨌든 나라는 사람을 믿고 구매해주는 거니까.
그래서 단순히 책만 드리는 게 아니고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서 이쁘게 포장해서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생겨난다.
어떻게 드리면 좋을까? 다행히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는지 클래스에서 멋진 사례들을 많이 참고할 수 있었다.
(책 + 굿즈 + 편지) X 정성 가득한 포장
참고한 사례의 구성은 보통 위와 같아서 나도 따라하기로 했다. 손재주가 없는 편이지만 다행히도 디자이너 친구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출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이라 서툴고 부족한 점이 많지만 책과 함께 꾹꾹 눌러담은 정성이 소중한 독자분들에게 잘 전해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열심히 책을 포장하던 중에 이렇게 정성을 표현하는 것을 웹/앱 서비스에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쿠폰 증정, 회원 등급 올려주기 같은 게 아닌 더 정성이 묻어나는 방식. 소프트웨어라고 정성도 반드시 소프트웨어로 보이라는 법은 없지 않나.
앱 출시 알림 신청자분 혹은 초기 구매자분에게도 마찬가지로 굿즈나 손편지를 줄 수 있을 것이다.(물론 상황에 맞춰 조정은 필요하겠지만..!)
책이든 앱이든 내가 만든 것을 소비해주는 사람에겐 모두 똑같이 감사하다. 그러니 정성이 가장 잘 담기는 표현 방식을 분야에 국한받지 말고 고민해봐야겠다.
그러고보니 스티브잡스의 Connecting the Dots가 떠오른다. 상관없어 보이는 두 점이 연결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고 하는데.. 이번 경험이 딱 그렇지 않나 싶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독립출판에 입문해본 건 여러모로 내 성장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뿌-듯..
독립 출판은 단순히 책을 독립적으로 찍어내는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책을 출간한 후 사람들에게 알리는 과정 또한 독립적이다.
자신이 가진 인적 네트워크 혹은 채널을 최대 한도로 활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내가 책을 낸 것을 모르고 사주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소장용으로만 독립 출판을 한다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책을 만들다보면 욕심이 생긴다. 다른 사람들이 내 글을 어떻게 생각할지 알고 싶다.
또 독립 출판한 결과물을 잘 홍보하면 내 브랜딩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도 든다.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라는 의욕이 충만해진다.
그런데 넘쳐흐르는 의욕과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막상 홍보하려 하니 내가 가진 인적 네트워크와 채널이 참 귀여운? 수준이라는 걸 느꼈다.
그럼에도 최대한 홍보를 했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내가 단편 소설을 독립 출판했다는 얘기를 하면 대부분의 지인분들이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오 무슨 내용인데?
앱을 출시하면 무슨 서비스인지 묻는 것처럼 책을 출간하면 무슨 내용인지 물어볼 게 당연했기에 답변은 준비해놓았다.
그러나 자기소개만큼 어려운 게 책 소개였다. 내 분신인 만큼 정성 들여 소개하고 싶은데 막상 카톡이나 말로 주절주절하려니 민망했다. 또 누가 물을 때마다 설명해주는 것도 반복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웹/앱 서비스처럼 소개 페이지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내게 책에 대해 묻는다면 소개 페이지 링크를 보내줄 수 있도록!
결심을 하고 바로 작업에 착수했는데 생각보다 만드는데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책 소개 페이지에 작가 및 책에 대한 정보 그리고 구매 링크까지 넣었다.
결과물을 보니 만들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이너 친구가 준 이미지 요소 덕분에 나름 깔끔한 페이지가 나왔다.
또 내가 구구절절 책에 대해 설명하는 것보다 소개 페이지에서 확인하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책에 대한 설명을 듣고 구매 링크까지 갈 수 있으니까.
이 부분은 IT 서비스 기획 때 배운 점을 활용한 것 같아서 뿌듯했다. 또 이전에 웹 개발을 배워놓은 내 자신을 칭찬하고 싶어졌다. 웹 개발은 여러모로 쓸 곳이 많은 것 같다.
책 소개 페이지 링크는 QR코드 이미지로 변환하여 책에도 넣었다. 카메라로 QR코드를 찍으면 소개 페이지로 이동하는 식이다.
나중에 책 후기가 쌓이면 소개 페이지에 추가해볼 예정이다. 후기가 많이 쌓여 보다 풍부한 소개 페이지가 되면 좋겠다.
그런데 소개 페이지를 만드니 욕심이 더 생겼다. 내 분신인 책에게 웹페이지뿐만 아니라 인스타 계정도 만들어주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자식에게 무언가를 계속 주고 싶은 마음이 이런 걸까..)
그래서 인스타그램에 내 소설책을 위한 전용 채널을 생성했다. 처음에는 큰 생각없이 만들긴 했는데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것 같다.
우선 본 계정과 섞이지 않은 책만의 콘텐츠를 아카이빙 할 수 있다. 독자분들이 촬영해준 책 사진, 후기 등을 이미지 형태로 모아두려고 한다.
또 책 소개 페이지를 채널 URL에 달아놓아 접근성을 나름 높이는 게 가능하다. 인스타그램 계정 당 하나의 URL만 달 수 있어 본 계정에 못 달았는데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
책 소개 페이지와 인스타그램 채널
욕심을 내다보니 이것저것 많이 만들게 되었는데 만족스럽다. 사실 IT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며 홍보나 마케팅쪽으로는 접한 적이 많이 없었는데..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해보니 흥미로웠다.
퍼스널 브랜딩 시대라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나도 나를 알리는 일에 좀 더 관심을 가져보자라는 다짐을 하게 됐다. 독립 출판으로 좋은 스타트를 끊은 것 같다.
아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소개 페이지와 채널 링크는 아래와 같다.
책 소개 페이지 링크
무화과 채널 링크
https://www.instagram.com/novel.fig/
클래스 선생님께서 독립 출판을 하고 나서 삶이 달라진 분이 많다고 하셨다. 이번 글을 정리하면서 나 또한 그렇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IT 기획이 아닌 다른 세계에 첫발을 디뎌보는 경험. 우당탕탕 실수연발인 과정이었지만 어쨌든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직접 경험해보면서 시야가 넓어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내가 이후 기획을 할 때 여러모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 기획을 IT에 한정지어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 참 좋다. IT와 비IT를 오밀조밀 잘 섞으면 더 재밌는 결과가 나올 테니 잘 연구해볼 생각이다.
언젠가 나만의 오프라인 공간을 열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잘 준비해놓으면 그때 멋지게 활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