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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Feb 07. 2019

동남아에 화교가 많은 이유

차이나 타운의 원조, 동남아시아

동남아시아에 간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때가 있다.


여기 중국인이 왜 이렇게 많아?
한자 간판도 엄청 많네..


중국인. 물론 어디에나 많다. 하지만 동남아 나라들엔 특히 더 많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중국인은 아니고 화교 혹은 화인인데 이들은 동남아시아의 경제를 주무르고 있다.


싱가포르는 아예 화교 국가라 할 정도로 그들의 인구 비중이 높으며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에선 화교가 끼치는 경제적 영향력이 막강하다.

(자세한 수치는 링크 참조)


그런데 어쩌다 화교가 동남아시아에 그렇게나 많이 살게 됐을까?


이번 포스트에선 동남아시아에 화교/화인이 많아진 이유에 대해 알아보자.



목차

화교와 화인 뭐가 다른데?

그들은 왜 동남아로 넘어갔을까?

그들은 낯선 곳에 어떻게 적응했을까?

화인이 주목받는 이유



화교와 화인 뭐가 다른데?


일단 화교(华侨)와 화인(华人) 둘 다 공통적으로 중화(中华)할 때의 '화'자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의미가 다르지는 않다.


해외로 이주한 중국인 혹은 그 후예


둘 간의 차이는 개념의 범위에서 발생한다.


먼저 화교는 일반적으로 신중국 설립 이전(1949년 전) 중국에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을 이른다. 왜 하필 신중국 설립 이전이냐면 그 뒤로는 중국 정부의 쇄국 정책에 의해 이주 행렬이 끊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인은 화교와 그들의 자손뿐만 아니라 최근에 해외로 이주한 사람들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화인은 굉장히 넓고 애매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설명 상의 편의를 위해 이번 포스트에선 보다 더 포괄적인 화인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



그들은 왜 동남아로 넘어갔는가?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화인들은 왜 동남아시아로 이주하게 됐을까?


1. 북방 유목 민족의 침략과 전란


중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북방 유목민의 침략이다. 혹독한 겨울만 되면 북방 유목민들은 먹고살기 위해 중국을 침략했다. 이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도 꾸준히 증축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북방 유목민의 침략에서 모티브를 얻은 중국 영화, 그레이트 월

그래도 북방 유목 민족은 보통 침탈을 한 뒤엔 도로 올라갔기에 아예 남쪽으로 오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래서 매 겨울마다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걸 피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주하는 농민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유목민의 침략 외에도 중국엔 전란이 참 잦았다. 춘추전국시대, 왕조를 전복시킨 수차례의 반란, 국공 내전 등등.. 그리고 그 과정 중에 개고생 하는 건 역시나 농민들이었다.


즉 중국의 남쪽 지방에서도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원주민들의 텃세를 이겨내더라도 전란이 일어나면 도루묵이었다.


그래서 안정적인 곳을 찾아 더 아래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러다 동남아시아까지 가는 경우도 생긴 것이다.


2. 농업 국가인데 논밭이 부족해


침략, 전란과 함께 이주의 핵심 요인으로 작용한 게 경작지 부족 문제였다. 중국은 농업 국가임에도 경작지가 너무 부족했다. 이주 외에도 중국 역사 전반에 아주 심각한 영향을 끼쳤을 정도로..

(중국 산업화 부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지? 링크 )


또 개인에게 돌아가는 경작지가 너무 적었기에 토질도 금방 나빠졌다. 제한된 토지에서 최대의 작물을 뽑아내기 위해 토지를 '착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민들은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끊임없이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북쪽엔 농사 지을 곳도 별로 없고 유목민도 계속 쳐들어왔기에 농민들은 주로 남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중국 남쪽의 토지들은 이미 토착민들의 소유였다. 때문에 이주민들은 척박한 땅을 개간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중국 계단식 논의 핵심 요인 = 농토 부족

결국 이주민들은 계속 남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설사 그곳이 정든 고향 혹은 모국이 아니더라도 생존을 위해서는 아래로 향해야 했다.


3. 이주 대상국의 초대


지금에야 미국이 최강이지만 옛날엔 중국이 최강이었다. 지금 미국이 최강인 것보다 더.


중국에서 생산하는 물품들은 최고급 대우를 받았다. 오늘날의 made in china와는 달랐던 것이다. 비단, 도자기 등등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어느 곳에서나 비싼 값을 받고 팔 수 있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중국의 제국들은 쇄국 정책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어서 중국 물건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국들은 중국의 상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각종 보상을 통해 중국의 상인들을 포섭하여 중국 물건을 자국에 더 쉽게 들여오고자 했던 것이다.


포섭된 중국 상인들은 로비, 불법 밀매 등을 통해서 주변국들에 중국의 물건들을 실어 날랐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주변국에 살림을 차리는 경우도 많이 생겼다.


그리고 동남아 국가들은 위에서 언급한 주변국들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동남아가 중국을 남아시아, 유럽으로 연결하는 교역로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제 무역항으로 유명한 싱가포르도 처음엔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항구 도시로 기획된 것이었다.

싱가포르

물론 위의 두 요인만큼 주요하진 않았지만 주변국의 초대 또한 화인들의 이주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 해당 요인은 화인은 타고난 상인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에도 한몫했다.

 


그들은 낯선 곳에 어떻게 적응했을까?


정든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기후도 다르고 말도 잘 안 통하는 곳이라면 더더욱.


또 토착민들의 텃세도 심해서 정착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에게는 더욱 까탈스럽게 굴지 않았을까?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화인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또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에서 유력한 영향력을 가진 세력이 될 수 있었을까?


강력한 영향력의 화상(华商, 화인 상인) 대회


이번엔 화인들의 생존 방식에 대해 알아보자.


1. 패시브가 된 근면함과 학구열


일단 화인들은 근면함과 학구열을 강조하는 유교 문화적 바탕을 가졌다. 그리고 이 문화적 바탕은 대를 이을 정도의 오랜 이주 경력을 통해 강화됐다. 고된 경험 속에서 근면함과 학구열을 강조하는 가치관이 더욱더 큰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기반이 제로인 상태에서 토착민의 텃세를 이겨내고 살아남으려면 부지런해야 됐다. 열심히 일하는 건 기본이고 끊임없이 배워야 했다. 그래야만 인재로 등용되어 사회 지배층에 포섭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동남아에 있는 화인들은 자신들이 오히려 유교적 가치관을 잘 이어오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고된 경험을 통해 유교적 가치관이 그들의 DNA에 박혔기 때문이다.


2. 차이나타운 전략


오랜 이주 경력의 화인들에겐 또 다른 정착 노하우가 있었는데 바로 같은 출신끼리 뭉치는 것이었다.


혈혈단신으로 타지에 온 화인들은 항상 위태로웠다. 말도 잘 안 통하는 토착민들이 밀고 들어오면 대응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화인들은 중국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머릿수를 늘려 토착민에 대응하고자 했다. 또 서로 간에 정보를 공유하고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덤이었다.


세계 곳곳에 있는 차이나 타운이 그 결과인데 동남아가 그 원조라 할 수 있겠다.


3. 씨족을 통한 본진/멀티 전략


작은 단위로 이동하는 화인들도 있었지만 씨족 단위로 전략적으로 이동하는 화인들도 있었다. 이런 본진/멀티 전략 또한 오랜 기간의 이주 경력을 통해 나온 것이었는데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본진/멀티 전략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한 건 바로 객가족이었다. 객가(客家)족은 그 이름에만 객(客), 즉 손님이라는 이름이 있을 정도로 이주가 잦았던 씨족이다.


그걸 잘 드러내는 것이 이들의 거주 방식인데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1. 집단 거주

2. 토착민의 공격을 막기 위한 요새화

3. 이주에 용이한 구조

객가 사람들의 집단 거주 방식, 토루

이 둥근 요새에서 씨족들은 함께 살며 토착민들에 대항하고 자급자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원형 마을이 이주 민족, 객가에겐 본진이나 다름없었다. 이주 민족에게 그나마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 중국은 언제나 불안정했다. 그래서 객가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곳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고 씨족 중 일부 사람들이 선발대처럼 바깥세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멀티의 대상 지역이 된 곳은 주로 남쪽 그리고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였다. 동남아시아에 간 객가 선발대는 본진의 지원과 오랜 이주 짬에서 나온 바이브를 통해 성공적으로 정착하면 본진에서 사람들을 줄줄이 데려왔다.


때문에 동남아의 화인 기업 중에는 가족/친족 기업이 많은 편이다. 애초에 중국에 가족 기업이 많은 편이기도 하지만 동남아의 화인 기업은 더더욱 그렇다.


멀티가 잘 자리 잡으면 본진에 감사의 의미로 명절에 찾아가거나 금전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또 현지에 씨족의 사당이나 향우회 같은 걸 세우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본진/멀티 전략은 객가족 외의 다른 씨족들도 많이 사용했으며 정착에 큰 도움이 됐다. 본진의 지원을 바탕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조금 더 나은 상황에서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4. 식민 정부와의 결탁


동남아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이방인이었기에 정치적 탄압을 많이 받았다. 현지 정부의 정책에 따라 호의적일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았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유럽 식민 정부였다. 동남아를 식민 통치하기 위해 들어온 유럽인들은 현지 사정에 밝지 않았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대리인을 필요로 했는데 화인들이 그 자리를 꿰찬 것이었다.


화인들은 특유의 성실함과 학구열을 통해 다진 능력으로 유럽인의 대리인 자리를 차지했다. 유럽인들 또한 거대 시장인 중국과의 커넥션을 가진 화인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화인들은 식민 정부의 대리인 역할을 하며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리고 영향력의 확대될수록 동남아시아에 유입되는 화인들의 숫자도 점차 늘어났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화인들은 식민 정부의 앞잡이 역할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남아시아 원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아주 괘씸한 행태였다.


외부에서 온 이방인이 식민 정부의 대리인 역할을 하며 원주민들을 뜯어먹다니.. 민족 간 갈등이 많이 일어났고 유럽 식민 정부에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민족 별로 대리인을 뽑도록 했다.


하지만 화인 세력은 그동안의 대리인 역할을 통해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상태였다. 경제, 정치적 영향력은 물론이고 머릿수도 너무 많아졌다.


그래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하나씩 독립하기 시작할 때 원주민들은 분노와 위기감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우리를 착취한 화인 놈들을 가만둘 수 없지.

화인들 머릿수가 너무 많으니 민주주의를 해도 그 놈들 뜻대로 될 수도 있겠는데?


그리고 이런 불만은 곧 화인 학살로 이어지기도 했다. 화인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정치적 희생양으로 죽임을 당했다. 또 싱가포르는 원래 말레이시아에 속해 있었는데 화인이 과하게 많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인도네시아 화인 학살 사건

결국 식민 정부와의 결탁은 화인 세력의 빠른 확대를 가능케 했지만 깊은 후환을 남기기도 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상처가 조금 아물긴 했지만 갈등의 골은 여전히 존재한다.



화인이 주목받는 이유


최근 들어 화인 경제권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사실 최근은 아니고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때부터일 것이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은 투자가 필요했다. 당시 중국에겐 돈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외 투자자 입장에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중국에 쉽사리 투자할 수 없었다. 특히 천안문 사건으로 중국이 국제적인 신용도를 잃으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그나마 자신들과 가까운 화인들에게 투자를 요청했고 대만, 홍콩 등에서 투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화인들도 잇달아 중국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인의 투자는 곧 중국 경제 발전의 마중물 역할을 하여 이후 다른 외국인 투자자들도 물밀듯 들어왔다. 즉 화인 자본은 G2 중국이 탄생하는 시발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도 동남아시아의 화인들은 중국과 긴밀히 교류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중국이 투자 측이 된 것이다.


급속도로 성장한 중국은 이제 대외적으로 확장하려 하며 화인들은 여기서 또다시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은 화인 네트워크를 통해 보다 더 용이한 확장을 하려 하고 화인들은 이 과정에서 기회를 잡으려 한다. 상부상조인 셈이다.


특히 최근엔 중국이 일대일로, RCEP 등 동남아시아를 포함하는 대규모 지역주의 대외 정책을 펼치고 있기에 동남아 화인이 더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중국의 지역주의 대외 정책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물론 화인이 동남아시아 화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엔 유럽, 미국, 아프리카 쪽 화인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들은 이전처럼 생존을 위해 이주하는 것이 아닌 보다 더 나은 교육 기회, 사업 기회를 노리고 가는 편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도전 중이며 동남아시아에서만큼 주류에 해당하는 위치에 서진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아직까지는 동남아 화인의 비중이 더 돋보인다.


또 동남아 화인은 이주 역사의 산 증인이기에 그들을 알아보면 미래 또한 가늠해 볼 수 있다. 고난을 피해 끊임없이 기회를 찾아 떠나 결국엔 삶을 쟁취해낸 사람들. 미래에 그들이 또 어떤 곳으로 향할지 주목해보자.



참고하면 좋을 자료


< 중국 대신 동남아로 4200만 화교 경제권에 주목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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