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범죄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사건의 대한 모든 내용은 실제 사건들을 기반으로 각색되었음을 알립니다. 또한 등장인물의 이름은 '뉴스젤리'의 "데이터로 보는 시대별 이름 트렌드, 요즘 핫한 이름은?"에서 무작위로 따온 것입니다.
어릴 때 들었던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말,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말처럼 범죄 수사도 때가 있다. 그게 바로 공소시효다. 아무리 범죄피해를 호소하더라도 공소시효가 지났다면 처벌을 할 수 없도록 되어있는데, 이 때문에 공소시효는 늘 논란이 되곤 한다. 특히 최근에는 친족성폭력 사건에서 그 존재감을 나타냈다.(https://www.nocutnews.co.kr/news/5866055) 강간의 공소시효는 10년이고, 미성년자일 때 피해를 입었다면 성인이 된 날부터 공소시효가 시작된다. 범죄자가 해외로 도피했을 경우 등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공소시효는 정지되지 않는다.
지안씨를 처음 만난 날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때였다. 깔끔한 옷차림의 지안씨는 처음으로 내게 자신의 명함을 건넨 피해자였다. 한참을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말을 가다듬던 지안씨의 첫마디는 자신의 업계가 좁다는 것이었다. 피해자들에게서 의외로 많이 듣게 되는 이야기 중 하나다. 다들 자신이 속한 집단이 다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자신의 피해가 금방 소문날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피해자들이 위축되는 이유 중 소문은 가장 큰 부분일 것이다.
지안씨의 이야기는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지안씨는 막 직장 2년 차에 들어선 부서 막내였다. 그날은 회식이었고, 지안씨의 부서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까지 함께 하는 회식이라 꽤 시끌벅적했다고 했다. 막내인 지안씨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한잔씩 마셔야 했고 2차로 옮기는 도중에 기억이 끊겼다고 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옆팀의 팀장과 같은 침대에 있었다고 했다.
푸르스름하게 날이 밝아올 때 혼자 깨어난 지안씨는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한다고 느꼈고 옷을 대강 걸친 채 서둘러 방을 나섰다. 건물 밖을 벗어나서야 그곳이 회식장소와는 전혀 다른 낯선 동네의 모텔임을 알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지안씨는 부디 아무 일이 없었기를 바랐다고 했다. 속옷도 입지 않고 있던 자신이었기에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아무 일이 없었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그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다시 올라오는 술기운과 풀리는 긴장에 그대로 잠에 빠졌다고 했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기억나지 않는 그날의 조각을 하나씩 모으면서 지안씨는 자신이 성범죄 피해를 당한 것임을 알았지만 그 시절에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 피해자들은 자기 의심을 먼저 한다. 자신이 술을 먹고 술김에 혹시 실수를 하진 않았을까 의심하고, 왜 그렇게 술을 먹었을까 자책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범죄임을 확신했을 때에도 자신은 한낱 직원일 뿐이라 이미 업계에서 입지를 가진 팀장을 고소할 용기가 쉽게 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한들 왜 8년이나 필요했는지 솔직히 궁금했다. 의문을 표하기 위함이 아니라, 어떤 마음이었는지, 잘 지내기는 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모든 질문이 상처가 될까 봐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또한 고소 사건이었기에 섣불리 지원을 할 수도 없었다.
우리나라 범죄피해자 지원은 범죄피해자 지원 기금을 통해 이뤄지고, 이 기금의 대부분은 법무부에서 집행하고 있으며 법무부에는 검찰이 속해있다. 피해자 지원 중 경제적인 부분은 검찰로 사건이 송치된 이후에 가능한 것이 대부분이다. 송치는 경찰 수사 단계에서 범죄혐의가 확인됐음을 의미한다.
만약 지원을 했다가 사건이 경찰단계에서 종결되는 경우 피해자는 지원받은 것들을 토해내야 할 수도 있다. 이 역시 피해자에게는 상처이고 부담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지원을 100% 약속할 수 없다. 약속을 했다가 원망을 듣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사건의 수사결과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음을 고백한다. 증거는 없다시피 할 것이고, 가해자는 부정할 것이 분명했다. 담당 수사관은 피해자의 말을 믿어줄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지안씨에게는 연락드리겠다는 막연한 약속만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꽃이 피기 시작하는 즈음이 되었을 때 지안씨 사건 담당 수사관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안씨를 지원해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수사관이 먼저 연락해 오는 일은 흔치 않았기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알겠다고 하고 바로 지안씨에게 연락을 했다. 다시 만나 지원제도나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면서 조심스럽게 물어볼 수 있었다. 8년을 어떻게 지냈느냐고.
지안씨는 내내 고민을 했다고 했다. 매일 고민했지만 살아야 했고, 커리어도 쌓아야 했고, 더 나은 곳으로 이직도 해야 했기에 고민을 하면서 일을 했고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고 했다. 그러다가 후배가 사내에서 성희롱을 당한 일로 고민상담을 해왔을 때 용기가 난 거라고 했다.
실은 저도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해보려고요.
지안씨는 웃으며 말했지만 8년이 지났는데도 안 괜찮다는 말을 덧붙였다.
저렇게 용기를 냈는데 경찰 수사 단계에서 사건이 끝나버리면 어떤 기분이 들까. 증거불충분으로, 너무 늦었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이 들지는 않을까 늘 지안씨에게는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증거가 불충분해서든, 죄가 되지 않아서든, 가해자가 죽어버려서든, 합의를 해서든 모두 불송치라는 이름으로 끝을 맺는다. 뒤에 내용의 의미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형사사건 절차의 불친절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지안씨에게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던 것 같다. 수사는 수사관의 몫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냉정히는 없다. 하지만 사건이 불송치되더라도 지안씨가 조금이라도 더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옛날 퀼트 천을 보면 각기 다른 무늬의 천 조각이 이어져 하나의 천이 된 걸 볼 수 있다. 딱 그런 마음이다. 한 사람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여럿의 노력과 도움이 필요하다. 그 조각 중 그래도 서넛은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 포기할까 봐요.
해보겠다고 말하던 지안씨는 경찰 수사가 길어지는 동안 고통을 포기라는 단어로 호소했다. 정신과 진료 주기가 짧아졌고, 상담을 가면 내내 울게 된다고 했다. 너무 힘들어서 사건 접수한 게 후회된다는 지안씨를 보면서 그냥 처음부터 무턱대고 믿어볼 걸 그랬단 생각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믿고 지원을 빨리 시작했다면 지안씨가 조금 더 건강한 마음으로 싸울 수 있었을까. 조금이라도 지금보다는 도움이 되었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쌀쌀한 날씨에 처음 만난 지안씨의 사건의 재판이 시작된 것은 한여름이 되어서였다. 피해자들은 수사과정보다 재판이 시작된 후에 더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지안씨의 경우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은 기분 때문에 힘들었다고 했다. 피해자는 형사 재판에서는 증인일 뿐이다. 모든 것은 검사와 판사가 결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자신이 아무리 탄원서를 내도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과 가해자가 벌금 조금 내는 정도의 처벌에 그치게 될까 봐 불안한 마음에 많이 힘들었다고 지안씨는 말했다. 1심이 진행되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지안씨는 살이 많이 빠졌다. 최초 지원하기로 한 상담회기로는 충분하지 않아 다른 방법을 이것저것 강구해야 했고 그렇게 같이 1년을 견뎌냈다.
결과적으로 가해자는 약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지안씨는 거액의 합의 요청을 거절했다.
실형이 나왔을 때 울 것 같은 마음으로 지안씨와 했던 통화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벅찬 마음을 목소리로 나누면서 그럴 수 없으나 나는 지안씨의 가까운 지인 같은 행복과 승리감을 느꼈다. 다 잘 된 일이다. 지안씨와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지만 지안씨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코트차림의 사람을 보면 지안씨가 떠오른다. 더없이 잘 살고 계실 거라고 믿는다. 지안씨 덕분에 내가 피해자를 믿고 연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특히 진술 밖에 없는 사건의 피해자를 만날 때일수록 그렇다.
증거는 휘발될 수 있어도 사람의 용기는 남는다. 그러니까 부디들 용기를 내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