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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재 Dec 12. 2022

116. 왜 & 언제까지 배워야 하나?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배움을 시작한다. 아기의 선생님은 엄마이다. 겉보기에 갓난아기의 생활은 먹고 자고 싸는 게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말도 못 하는 아기를 안고 엄마는 눈짓, 손짓 혹은 몸짓과 외마디 단어나 짧은 문장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반복적인 엄마의 수어와 구어를 드디어 아기가 따라 한다. 이것이 배움의 시작이다.  이처럼 배움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흉내 내고 따라 하며 재현하는 것이다.


아기가 자라 아이가 되면, 이제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며 또다른 배움이 시작된다. 유치원 혹은 어린이 집에서 선생님께 배우고 친구들로부터 배운다. 놀이로 통해 배우니, 배움이 무척 즐겁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사정은 180도 달라진다. 이때부터는 즐겁고 재미있는 놀이를 통한 배움이 끝나고, 어렵고 힘든 그래서 하기 싫은 배움이 아이 의사에 반해 시작된다. 시험공부를 위한 경쟁이 심해진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하기 싫은 시험공부는 절정에 달한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에 들어가라는 부모님의 성화와 사회적 권유에, 고등학생 청춘을 하기 싫은 입시공부에 몰빵하며 심신이 기진맥진 상태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나 그렇지 않은 아이나 모두들 억지로 책을 잡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일까, 12년 동안 자연스럽게 터득된 책을 멀리하기(독서 안하기) 습성이 성인이 된 한국인들에게 만연한 것은 아닐까?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도대체  우리 인간은 배워야 할까? 내 생각엔 산다는 건배움의 연속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배우지 못하면,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 느끼지 못한다. 느끼지 못하면, 삶의 의미가 사라진 듯해 맘이 채워지 않아 공허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생각하지도, 알지도 모르는 사이를 '부지불식간'이라 한다. 합리주의 철학의 창시자,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합리주의 출발점을 인지했다. 그는 인간이 생각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고, 생각을 근거로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려 했다. 그렇다. 인간은 생각한다.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수 없다. '부지불식간'이란 말에서 '부지''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불식'은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생각이 배움이고 배움이 생각이다. 생각은 존재이고 존재가 생각이다. 그렇다. 생각이 배움이며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배우지 않는 삶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없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죽어 있는 삶이다.


스페인어에서 '알다'라는 뜻으로 'saber' 와 'conocer' 동사가 있다. 첫 번째 'saber' 는 "~ 할 줄 알다", "~사실을 알다" 라는 뜻이고, 두 번째 conocer는 "만나봐서 알다", "가봐서 알다"라는 뜻으로 과거의 경험을 통한 앎을 뜻한다. 그렇다. 배움은 경험이다. 배워야만 비로소 알 수 있다. 배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고, 모르면 불편하고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느낄 수 없다.


인생은 선택과 후회의 연속이다. 뭔가 선택하려면 먼저 선택의 기준을 정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알아야 한다. 기회비용을 상쇄하고 남을 만한 선택이어야 후회가 덜하기 때문이다. 일단 선택를 하게되면, 반드시 조만간 일정한 정도의 후회가 따르기 마련이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하기에 예전의 선택은 오늘의 기대에 늘 부족하고 모자란 느낌이다. 오늘의 기대에 따른 과거의 행위에 대한 평가가 바로 '성공'과 '실패'이다. 성공과 실패는 배움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치는 정거장 같은 중간결과일 뿐이다. 결코 우리의 종착지가 될 수 없다. 하면 배우고 배우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세상이 변한다고 한다. 우리는 오늘만 사는 하루살이가 아니기에, 반복이 아닌 연습을 통해 오늘의 실패를 극복하고, 또 한편으로 오늘의 성공을 더욱 성장시키는 배움의 지속이 필요하다.


경희대 호텔관광대학 입구에는 "생각하는 자 천하를 얻는다"라는 글씨가 새겨진 표석이 서있다. 우리는 왜 배우며, 그 배움은 언제까지인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배움이 생각이고 존재이기에, 사는 동안 우리의 배움은 계속되어야 한다. 단지 배움의 희비, 즐거움과 괴로움의 선택은 이 글을 읽은 여러분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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