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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방 Dec 05. 2019

pieces/ 옆 테이블 불륜 커플 목격담

도쿄로 마리가 놀러 왔다.

서울에서 노세범 파우더 펙트 두 개를 야무지게 챙겨 온 그녀와 잔뜩 아이쇼핑을 한 후, 예약해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훌륭한 샐러드와 로스트비프 전채를 해치웠을 때쯤 우리 옆 테이블에 꽤나 나이가 지긋한 백인 커플이 앉았다. 둘 다 체격이 건장하고 활기찼다. 도쿄에서 외국인 노부부를 보는 것은 흔한 일이라 크게 신경쓰지 않고 밀린 수다를 이어가던 와중, 내 우측에 앉은 남자만 보이는 위치에 있던 마리가 문득 물었다.


"여자분도 반지를 차고 계셔?"

"반지? 아니."

"남자분은 너무나 명확하게 끼고 계시는데... 근데 언뜻언뜻 대화 들어보면 둘이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


그때부터 흥미가 생긴 우리는 실례인 줄 알면서도 영어로 진행되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추론한 바로는  남자는 독일, 여자는 러시아 사람이었다. 남자는 전부인이 하나, 현부인이 하나, 마지막으로 건너편에 앉은 여자구까지 - 여성 편력이 어마무시한 사람이었다. 겨울에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자며 계획을 세우던 그들에게, 여자의 투정으로 잠시 위기가 왔다.


여자는 그 거대한 체구의 남자를 '작은 말(little horse)'이라고 부르며 현부인에 대한 마음이 다 정리된 게 확실한 지를 물었다. 그러자 테이블 위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남자가 엄숙하게 대답했다.


'지금 내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야.'

'그게 뭐죠.'

'나타니아.'


마리와 나는 그대로 마시던 와인을 뿜을 뻔했다. 작은 말과 나타니아라니... 당나귀와 나타샤도 아니고 말이다. 그 후로도 이 클리셰 범벅인 커플은 아주 즐겁게, 끊임없이 겉도는 대화를 이어갔다. 빵은 어떻게 먹어야 맛있더라, 당신의 고향 모스크바에 가보고 싶다, 대머리가 되기 전 내 머리 색은 어땠었다 등... 우리는 아무 대화도 못하고 드라마를 시청하는 심정으로 앉아있다가 더 이상 웃음을 참기 힘든 수준이 되었을 때쯤 ㅡ 디저트를 주문한 뒤 남자는 여자 옆으로 옮겨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ㅡ 도망쳐 나왔다. 아 - 대체 무슨 맛이었더라 트러플 리조또...


집에 오자마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의 전문을 부랴부랴 검색해보았다. 으레 같이 언급되는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그림도.


그래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탄다는 내용이었지. 샤갈과 백석 시인을 싸잡아 격하시킨 오늘의 불륜 현장 목격은 그야말로 코미디였다. 다시는 이 시를 폭소 없이 읽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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