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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방 Dec 11. 2019

네스프레소 머신을 샀다

못하는 건 안 하련다

꽤 오랫동안 핸드드립 커피 내리기에 도전했다.

카페인 중독에다 커피 특유의 향과 온도 좋아하지만, 사실 딱히 드립 커피가 아니어도 된다. 모카 포트, 프렌치 프레스, 기계로 추출한 커피, 더치커피, 심지어 믹스다방 커피도 좋아한다.  그럼에도 내가 계속 핸드 드립에 도전했던 이유는, 전에 만나던 사람이 드립 커피를 좋아해서였다. 콜드 브루를 직접 내려마실 정도로 커피광이었던 그가 각종 원두며 저울, 드리퍼, 그라인더 등을 잔뜩 사주는 바람에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때에 머신을 사는 것은 아예 선택지에도 없었다. 가끔 집에 놀러 오는 날 아침이면 그는 기가 막힌 커피 한 잔을 정성스레 내려주곤 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원두를 사용해서 커피를 내려도 내가 내린 잔은 왠지 참 부족했다. 그는 농담처럼 '애정이 안 들어있어서 그래'라고 했지만, 매일 아침 맛없는 커피를 마셔야 했던 나는 진심으로 화가 날 지경이었다. 저울로 커피와 물의 양을 재서 비율을 맞추고, 첫 추출 이후에는 30초 동안 향을 내고, 전체 추출 시간은 3분 미만으로 두고 등등, 책과 인터넷에 나온 웬만한 규칙은 다 지켰는데도 내 결과물은 항상 쓰고 시고 옅었다. 결국 진하고 향이 좋은 핸드드립은 한 번도 못 내려봤고 그게 매우 서글펐다.


생각해보니 내가 아무리 애써도 못하는 것들이 꽤 있다. 먼저 종이접기. 열심히 단계 별 안내를 보고 따라 접어도 모소리마다 뭉툭하고 도무지 폼이 안 난다. 다음은 오랜 고민인 길 찾기. 골몰히 지도를 들여다보며 발걸음을 옮겨도 엉뚱한 곳에 와있기 일수라, 내 오랜 친구들은 절대 길을 잃은 내가 제대로 찾아오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카카오 택시를 타라고 하지. 이케아 가구 만들기와 퍼즐 맞추기도 참 못한다. 한참 공을 들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몇 조각은 무조건 없어져있다. 또 뭐가 있을까... 신발끈 묶기, 꼬인 이어폰 줄 풀기, 전 뒤집기, 빨래 꽉 짜기 등을 못한다. 그냥 손목이 약한 건가...


이런 것들이 순간순간 참 속상했는데, 그저께 10만 원을 들여 핸드 드립이 주는 패배감을 극복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샀다: 네스프레소 머신. 


삼일 만에 소중하게 도착한 아이를 해가 잘 드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오늘 아침, 진한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셔보았다. 진짜 너무 맛있었다. 실실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내가 좋아하는 고소한 맛의 캡슐을 골라서 머신 안에 넣고, 에스프레소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실패 없이 맛난 커피 한 잔을 100%의 확률로 마실 수 있다. 물의 온도, 커피와 물의 비율, 물을 붓는 속도 뭐 하나 신경 쓸 거 없이. 원래부터 아메리카보다는 에스프레소를, 라떼보다는 마끼아또를 좋아하는 내게 네스프레소 머신은 정말 완벽한 기구가 아닐 수 없다.


핸드 드립에 열심히 도전해 보고도 안 되는 거라는 것을 알아 환상도 미련도 없는 거겠지만,
한 가지 소담한 다짐을 해본다. 삶이 불편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


못하는 건 너무 오래 잡고 있지 않으련다.

종이 접기는 김영만 아저씨께 맡기고 (죄송해요 아저씨 어른이 되어도 쉽지 않네요), 친구를 만날 땐 잘 아는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다 만들어진 가구와 그림을 사련다. 세상에는 신발끈 없는 신발이 넘쳐나고, 웬만한 세탁기에는 건조 기능이 붙어 나온다. 돈은 많이 벌어야겠다.


내가 잘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이런 거 못한다고 서글플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못하는 건 안 하련다. 쌈빡하게. 손쉬운 대안이 있다면 선택하고, 대안이 없다면 손 떼고.


아 물론, 이러고서도 드립 커피 관련 장비들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을 나라는 건 알고 있다. 가끔건방지게 '감에 의지하여' 길을 찾아보기도 할 테고, 엉망진창으로 접은 색종이 개구리를 누군가에게 선물하기도 할 테지. 그건 그거대로, 못하는 맛으로 하는 거지 뭐. 쉽게 살자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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