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 하기만 해도 하나뿐인 내가 된다니. 벅찬 일이다.
그런 새벽이 있다. 다른 때였으면 졸음으로 꺼졌을 생각의 불씨가 어째서인지 점점 불길을 키워서 마음을 달구는 어두운 오전의 순간이 있다. 대체로 좋아하는 누군가를 생각할 때가 그렇고, 무언가를 지금 당장 해야겠다 싶은 조바심이 들 때 그렇다. 지금은 글을 당장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읽은 두어 장의 페이지 때문이다. 거기서 발견한 몇 개의 문장이 심장을 움켜쥐고는 마음을 데웠다. 그런 열을 삼키고 잘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첫 문장은 "그 구석구석을 파악하는 일에는 늘 차분한 설렘이 있다"였다. 차분함과 설렘이 서로 붙을 수 있는 단어였다니. 설레지 않으면 차분하고, 차분하다면 설레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같은 극이라고 생각했지만 서로 다른 극이었다. 저 표현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일상이 널렸었다. 누군가 하는 이야기의 앞머리에서 '이건 내 삶 전체에 플러스가 되는 시간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그랬다. 첫 근로를 시작할 때 그랬고 혼자 첫 기차를 탈 때 그랬다. 내가 만든 요리의 씹히는 대파가 달 때 그랬고 오늘 꽤 괜찮은 글을 남긴 하루일 때 그랬다.
되짚어 보면 설렘은 항상 열정적이지 않았다. 확실하게 차분한 설렘도 있었다. 차분한 설렘이어서 확실하게 들떴었다. 쨍한 2시의 햇볕보다 새벽 6시 무렵에 친절한 햇살을 자세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차분한 설렘이란 설렘의 촉감과 향을 충분히 들여다보게 했다. 어쩌면 지금 잠이 달아난 이유도 차분한 설렘 때문이다.
두 번째 문장은 "그 후에는 모든 '처음'을 하나씩 지워가며 낯선 동네에 차츰 익숙해져 가게 된다."이다. 처음을 지워간다니. 처음을 지워간다니! 대학에 오기 전 나도 모르게 간직하고 있던 지워가면서 행복해했다. 처음 간 찜질방도, 처음 마신 막걸리도, 처음 해본 연애도. 운이 좋아서 때 타지 않은 처음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씩 지워가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만끽하고 있다. 이어서 세 번째 문장을 소개한다. "여태 내가 몰랐던 구석이 있다는 것은 아직 내가 모르고 있는 구석이 더 많으리란 걸 짐작케 했다."
무언갈 알아가면서 느낀다. 앞서 말한 처음들도 그런 앎의 일부다. 삶도, 우정도, 예의도, 처세도, 재치도, 배움도, 문장도, 사랑도, 우울도, 성장도, 결핍도 내게 몰랐던 것이 '아 그게 그래서 그런 거였어'라는 형태로 다가올 때 반갑다. 미숙함이 한 꺼풀 벗겨진 기분이 든다. 동시에 저 문장의 생각이 든다. 내가 몰랐던 구석이 아직도 더 많이 남아 있겠구나.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깊이는 아직도 한 없이 얕겠구나. 과거의 얕음에 비하면 현재는 꽤 깊을지 몰라도, 앞으로 펼쳐질 바다 앞에선 그저 한낱 웅덩이에 불과하겠구나.
그런 문장이 있다. 둘러가지 않고 곧장 가로지르는 문장이 있다. 가로지른다는 이야기는 이전에 없던 길을 만든다는 이야기다. 그러기 위해서 거기엔 얼마나 큰 힘과 날카로운 통찰이 서려있어야 할까. 하지만 동시에 한없이 친절해서 그리 현명하지 못한 사람도 그 사람이 획득한 현명에 쉽게 도달하게 한다. 잘 쓴 글이란 그런 것이겠지. 이런 것들을 본 직후에는 내쪽으로도 흘러들어오는 잔여물들이 증발하지 않고 남아있어 그것들을 재료로 정성스레 쓰고 싶어진다. 좋은 글을 보면, 좋은 글에 대한 글을 쓰게 된다. 이런 동어반복과 같은 우스운 광경 덕에 글이 더 좋아진다. 이럴 때면 마치 글에게 편지를 쓰는 것 같다.
민감함이 최대로 기우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써지는 글은 그것을 쓰는 나조차도 감탄한다. 나에게서 이런 문장이 나왔다는 사실에 놀란다. 제 발에 제가 걸려 넘어지는 것처럼. 이런 우스꽝스러운 자뻑의 순간이 언제나 반갑다. 스스로를 언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지를 묻는다면 '이걸 내가 만들어냈다고?' 하는 새삼스럽게 여기는 찰나가 아닐까. 그런 식으로 창작은 삶을 윤택하게 한다. 100번 만든다고 100번 마음에 드는 게 나오지는 않지만, 그중에서 하나가 얻어걸릴 때의 쾌감 때문에 200번, 300번의 새로움을 추구하게 한다. 창의성을 발휘하는 일은 설레는 일이다. 언제 감탄할 만한 무언가가 나올지 나조차도 모르기 때문이다. 창작은 일종의 도박이다.
그런 수많은 경우의 수를 내딛고 나온 생각과 생각의 결과물은 너무도 소중하다. 그래서 찰나의 생각도 지나칠 수 없다. 그 불씨가 어떤 크기의 불이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어쩌면 난 나보다 나의 생각들을 더 귀히 여길지 모른다. 그래서 이불을 걷어차고 노트북을 여는 것일 테고,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10권 남짓의 일기장을 다시 되찾을 수 있다면 100만 원이 아깝지 않다고 느끼는 것일지 모른다.
나 자신은 쉽게 함부로 여길지 몰라도 내가 낳은 좋은 생각은 함부로 여기지 않는다. 주객전도일지도 모른다. 나도 안다. 밭의 배추가 아무리 실해도 땀 흘린 농부보다야 귀하다고 말하진 못할 테니까. 사람이 있어서 생각이 있는 거니까.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기보다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가 더 맞는 말일지 모르겠다. 어쩌면 저 말을 한 사람도 자신의 생각을 자신보다 위에 놓아서가 아닐까. 그만큼 자기 생각에 자부심이 넘쳤기 때문일 것이다.
창문을 보니 해가 밝았다. 이제는 새벽이라기보다 아침에 가까운 시간이다. 어떤 말로 글을 잠가볼까 하다가 낮에 들었던 친구의 '적절한 시기에 태어났다'는 표현을 떠올린다. 친구를 통해 깨닫는다. 지금이 아니었다면 절대 나오지 않았을 무언가라고 직감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서 글도 그렇다. 지금 이 새벽이 아니었으면 결코 나오지 못했을 글, 책상 위 옆에 놓인 스탠드의 불빛과 노트북 아래로 새어 나오는 플레이리스트가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글이 있다. 삶은 뒤돌아 보면 모두 적절한 시기이자 절묘한 기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문장을 읽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보장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때, 그런 하나하나의 적절한 계기들에 고마워진다. 동시에 나 또한 그런 계기가 되고 싶다고 느낀다. 너무나 훌륭한 계기들로 지탱되고 있는 나이기에. 결국 그들을 멋대로 따라 하고 싶어지게 된다. 멋진 누군가를 보고 따라 하기만 하면, 덩달아 나도 그곳에 가까워진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가.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누군가를 따라 할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어느 누구를 데려와도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유일한 내가 되어있을 것이다. 따라 하기만 해도 하나뿐인 내가 된다니. 벅찬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