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자유와 권리의 소중함
어릴 때부터 나는 음식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희한하게 우리 가족 중에 나만 그러했다.
할머니는 가끔씩 머리 고기나 염통이 드시고 싶으시다고 시장에서 사 오셨는데, 그 외 식탁 위에 올라간 소위 '맛있고 좋은' 음식들은 대부분 어린 나와 동생에게 양보하곤 하셨다. 여전히 향이 강한 카레, 후추와 매운 음식은 안 드시고 피자, 파스타 등 양식도 선호하지 않으신다. 그래도 이제는 할머니가 치킨 부위 중에 날개를 가장 좋아하신다는 것도 잘 알고, 종종 떡이나 짜장면이나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을 때 내가 사드릴 수도 있다.
엄마는 건강한 집밥을 좋아하신다. 밖에서 외식을 해도 된장찌개를 사드시는 진정한 한식걸이다. 밀가루는 어릴 때부터 소화가 잘 안 되어서 안 좋아하시고, 과자나 음료수, 아이스크림은 안 드신다. 옥수수, 고구마나 과일은 좋아하시고 우유도 꼭 챙겨 드신다. 완전히 클-린한 식성에 가까운데, 몸에 안 좋은 음식이라 봐야 믹스 커피 연하게 하루 한 잔 드시는 정도이다.
반대로 아빠는 과자, 음료수, 아이스크림을 무척 좋아하신다. 엄마가 혼자 여행을 가셔서 집에 안 계시면, 아빠는 꼭 KFC나 시장에 가셔서 치킨을 사 오신다 ㅋㅋㅋ 콜라도 엄마 몰래 우리끼리 나눠 먹는다. 아빠는 집 근처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단골손님이다. 붕어싸만코 5개를 사놔도 1일 1붕을 하셔서 금방 없어진다. 음식에 욕심은 없지만, 시원한 물냉면을 좋아하신다. 비빔면에도 얼음을 넣어 드시는 불꽃 아버지다. 커피 땅콩도 사두면 매일 조금씩 흡입하신다.
동생은 원래 무엇을 먹어도 아예 기억을 못 하는 음식 무관심자였다. 그래도 최근에는 같이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음식 사진도 찍고 한다. 국물을 좋아하는 샤브샤브, 훠궈 광인이다. 치킨보다는 피자를 좋아하고, 커피를 거의 안 마신다. 민트초코와 파인애플 피자를 좋아한다. 아빠와 동생은 생 갑각류 알러지가 있다.
나는 키위 알러지가 있고, 그 외에 먹을 수는 있지만 안 좋아하는 음식들이 자잘하게 있다. 지금 생각나는 건 푹 익힌 당근, 콩밥과 호박밤대추콩떡, 약밥, 빵에 들어간 건포도와 자잘한 견과류, 생크림 케이크 안에 들어간 파인애플 정도. 뭐가 섞인 걸 안 좋아한다. 굳이 먹어야 한다면 다 골라내서 먼저 먹어 치워 버린다. 그 외에 곱창, 닭발, 번데기, 추어탕, 마라, 순대, 내장, 가지무침, 평양냉면, 녹차 아이스크림, 회, 청국장, 깻잎 다 좋아한다. 개구리 뒷다리와 메뚜기도 먹어 봤다. 바퀴벌레랑 밀웜은 안 먹고 싶다... 민트초코는 배스킨라빈스만! 근데 민초 바나나킥도 은근히 맛있다. 고수도 안 좋아했는데 새우타코에 넣어 먹어 보고 신세계를 느꼈다 ㄷㄷㄷ 선지만 안 먹어봐서 어떨지 아직 모르겠다.
https://m.cafe.daum.net/dotax/Elgq/4010122?svc=topRank
나는 책도 영화도 방송도 음식이 나오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책), 카모메 식당(영화), 맛있는 녀석들(방송) 같은 작품들을 떠올리면 쉽다. 한때 무한도전 먹방도 계속 돌려 봤다. 아주 어릴 때는 요리사가 되고 싶었고, 엄마의 요리책들을 읽고 읽고 또 읽으며 동생과 방 한 구석에서 먹고 싶은 요리인지 아닌지 고르는 놀이도 하곤 했다. 인터넷이 발달하며 나의 관심은 오로지 맛집, 먹거리를 다룬 블로그에 올인되었다. 전형적인 먹방 유튜브는 잘 보지 않지만, 어쨌든 여전히 음식과 관련된 영상들을 주로 본다.
그만큼 나는 먹을 것을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인데, 이런 내가 인생에서 하루종일 굶어 본 날은 단 하루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한창 운동을 매일매일 열심히 할 때인데 퇴근길에 바로 운동을 가느라 자연스럽게 1일 1식을 했고, 그러다가 그냥 하루종일 배가 안 고파서 굶어 봤다. 아무렇지 않았다. 하도 배가 안 고파서 계속 아무것도 안 먹고 아사(?)하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는데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잘만 먹고 있더라. 신기한 건 내가 나 낳았을 때의 엄마 나이가 되니 점점 엄마처럼 식사량도 줄고 차가운 거, 단 거 안 좋아하게 되고, 입맛이 변한다.
우리 엄마 어렸을 때는 반 친구들이 된장, 김치, 밥 이렇게 도시락을 싸왔다고 한다. (된장찌개 아님 주의) 엄마보다 어린 나잇대에서도 계란 후라이, 햄 반찬을 밥 밑에 몰래 깔아서 숨겨 먹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올 정도다. 엄마도 만화 검정 고무신에 나온 것처럼 학교에서 옥수수빵과 물에 탄 가루우유를 줬다고 한다. 그리고 기영이가 아플 때 먹었던 바나나는 구경도 못해봤다고 한다. 이거 풀영상으로 보면 은근 눈물 난다. 그래도 다행히 집에서 농사를 지어서 어린 시절 엄마 집에는 먹을 것이 많았지만, 수돗물로 배 채우는 친구들도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수제비, 칼국수 같은 밀가루 음식을 질리게 드셔서 지금도 그 음식들을 안 좋아하신다.
모두가 다 된장, 김치, 밥을 도시락으로 싸 온다면 내가 그렇게 먹어도 크게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치킨 먹는 친구들이 부럽기는 했어도, 내가 먹는 소박한 엄마표 김밥과 유부초밥도 좋았다. 엄마는 패스트푸드, 배달 음식을 정말 안 좋아하신다. 내 평생 엄마가 사주신 햄버거는 엄마 친구랑 그 집 애들 만날 때나 롯데리아 사주셨던 길쭉한 버거뿐이었다. 물론,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파파이스 가고 떡볶이 먹고 내돈내산으로 겁나게 먹고 다녔다. 중학교 때에는 매주 주말마다 맥도날드에 갔는데, 영화 '슈퍼 사이즈 미'를 보다가 나 같은 사람들을 맥도날드가 '헤비 유저'라고 부른다는 걸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요즘은 맥도날드에 거의 가지 않는다. 이제는 더 맛있는 음식들이 널려 있고, 맥도날드 매장이 내 출퇴근 동선에 '완벽히' 놓여 있지 않고 (매일 가는 지하철 역 쪽에 있기는 함), 무엇보다 그 음식들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전까지는 아무리 요리책에서 인형 케이크니, 전복 스테이크니 다양한 메뉴를 구경해도 내가 그걸 직접 만들 자신도 없고 사 먹을 곳도 돈도 없었지만, 이제는 외식 문화와 경제의 발전으로 먹부림을 할 수 있는 인프라가 정말 좋아졌다. 먹기 좋은 세상이다. 아 나 때는 말이야! 피자헛에서 생일 파티하고 그랬어... (진) 현재의 나는 해외여행을 통해 여러 나라의 맛있는 음식들도 경험해 봤고, 엄청나게 비싼 음식 혹은 연돈처럼 웨이팅이 엄청 긴 음식이 아닌 이상 웬만한 건 다 사 먹을 수 있다. #벽제적금가보자고
이런 세상에서 치킨이나 피자나 마라탕이나 하여간 먹고 싶은 음식을 한 달에 딱 한 번만이라도 '못' 사 먹는다면 굉장히 불행한 일로 치부될 것 같다. 알러지가 있지 않는 한, 어떤 음식을 먹어도 먹지 않아도 그것은 우리 모두의 자유다,라고 지금까지는 생각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 그 누구라도 행복할 권리가 있고, 더군다나 먹을 것에 진심인 우리나라에서 최소한 먹고 싶은 걸 가끔은 먹을 수 있어야 마땅한 것 아닌가.
책 '매일 같은 밥을 먹는 사람들'에 나오는 분들 역시 먹고 싶은 음식이 없는 게 아니다. 한정된 예산 내에서 병원비 때문에, 주거비와 양육비와 예비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식비를 가장 먼저 포기할 뿐이다. 밥을 제대로 안 줘? 가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사는 우리 사회에서, 무엇보다 '이렇게 먹으면 미래에 아플 수밖에 없는 식단'임을 뻔히 알면서도 식비에 돈을 쓸 수 없는 사람들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할까.
나는 밑반찬만으로 밥 먹는 것이 정말 싫다. 콩자반 싫다. 김치랑 맨 밥 먹는 것 완전 싫다. 무말랭이 무침이나 멸치 볶음도 조금은 먹겠지만 그것만으로 밥을 먹으라면 '안 먹고 말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밥 안 주는 건 직접 챙겨 먹으면 되니 화나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을 여러 끼니에 걸쳐 억지로 먹어야 한다면 정말 끔찍하다. 나에게는 단골 식당조차 없다. 외식을 자주 하지 않으니 기회는 한정되고 맛집 선택지는 많고. 그래서 항상 새롭고 맛있는 곳을 시도한다. 처음 먹었을 때 엄청 맛있었던 음식도 또다시 먹으면 맛이 덜하다.
'매일 같은 밥을 먹는 사람들'은 국민일보의 '빈자의 식탁'이라는 기획 기사를 통해 먼저 독자들과 만났다. 읽다 보면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을 접할 수 있다. 어떤 분은 매 끼니 라면만 먹는 것도 안타까운데, 일반 봉지 라면을 한 개 반씩 끓여 먹고 남은 스프에 사리면을 또 끓여 드신다고 했다. 건더기도 없고, 계란도 김치도 없었다.
유튜버 허팝이 과도한(?) 기부로 인해 잠깐 구독자들로부터 먹을거리를 받았던 적이 있다. 남는 음식은 또 기부하고 서로 돕는 훈훈한 영상이었는데, 처음 저금통을 깬 돈으로 라면을 사서 반만 끓이고 국물을 버리지 않고 남겨두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8z6dqGoYkg
또 다른 분은 노브랜드 버거로 단백질 보충을 한다고 하셨다. 가장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고기라고. 나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들이다. 그리고 너무나 차가운 현실이다. 우리는 누구나 갑자기 아플 수 있다. 직장이 없어지거나 해고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무섭다. 나에게 불운이 겹쳐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자유와 권리'가 사라져 버릴까 봐.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의 개미처럼 현재의 내가 열심히 돈을 모으는 이유는 미래의 나를 위해서다. 곳간에 아무것도 없이 겨울을 맞이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다 되는 것도 아니다.
https://www.kmib.co.kr/issue/poortable/story1.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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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주 작은 희망이 생겼다. '매일 같은 음식 먹기가 주특기'라는 하루결님의 브런치스토리 글을 보고 나서다. 우리 사회에 있는 모든 구성원들이 매일 다르고 화려하고 소위 '맛있는' 음식을 먹지는 못 하더라도, 내 입에 질리지 않고 내 몸 건강에도 좋은 음식을 챙겨 먹을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존엄'의 문제다. '빈자의 식탁'과 '매일 같은 밥을 먹는 사람들'을 통해 매일 설탕만 들어간 물에 잔치 국수를 말아 드시거나, 마지막으로 드신 과일이 5년 전 수박이라는 사연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조리가 쉽고 오래 보관하며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식품에 의존한 식단은 어쩔 수 없겠지만, 하다못해 염분이라도 좀 더 줄이고 계란 후라이 하나, 저렴한 과일, 생선 한 토막의 여유는 허락되었으면 한다. 제철 자연 음식이 포인트다. 고구마, 방울토마토, 두부 같은 식품들이 충분히 지원되면 좋겠다. 못난이여도 영양 좋고 맛만 좋은 재료들이 우리 모두의 건강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무섭도록 풍족한 세상에서 뿌링클이 도대체 뭔지, 탕후루가 어떤 맛인지, 그게 내 입맛에 잘 맞는지 아닌지는 최소한 직접 먹어 보고 선택하는 여유가 허락되기를 원한다. 그래야 잠깐의 일탈과 경험을 통해 매일 같은 밥을 먹더라도 좀 더 건강한 선택권을 가질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나의 소원이다.
https://brunch.co.kr/@harugyel/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