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M 구매 담당자에서 글로벌 테크 기업 AI 사이언티스트까지
한동안 꿈속에서 나는 늘 무언가에 쫓겼다. 화산이 폭발해 비행기가 연착되고, 자재는 도착하지 않아 생산 라인이 멈추는 악몽. 구매 담당자였던 시절 겪었던 스트레스는
퇴사 후에도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치열했던 숏티지(Shortage)의 현장은, 훗날 내가 데이터와 AI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땐 알지 못했다.
현재 나는 글로벌 테크 기업에서 AI Scientist로 근무하고 있다. 초기에는 ML(Machine Learning) 기반의 예측과 분류 문제를 해결했고, 최근에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Agentic AI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공부에는 끝이 없다는 생각에 시작한 파트타임 박사 과정 덕분에 여전히 '박사 지망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지만, 사실 이 모든 여정의 시작은 지금과는 꽤 다른 곳에 있었다.
독일행 티켓을 내려놓고 얻은 것
대학원 진학 전, 나의 목표는 명확했다. 바로 독일 취업이었다. 자동차 산업의 메카이자 호밀빵, 테크노, 베를린 필하모닉, 그리고 하리보가 있는 나라. 제조업을 사랑하는 나에게 독일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조합이었다. 3년 가까이 어학원을 다니며 영주권 요건을 준비했고, 마침내 해외 이직의 기회가 눈앞에 찾아왔다.
(슬프게도 지금은 독일어로 Danke schön(당케쉔),
Ich liebe dich(이히리베디히)만 또렷이 기억난다)
하지만 막상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내가 정말 원하는 포지션인가?’, ‘이 직급이 맞는가?’ 생각할수록 조건 앞에 수식어만 늘어났다.
며칠을 곰곰이 고민한 끝에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어디서(Where) 사느냐' 보다 '무엇을(What) 하느냐'는 본질에 있었다.
장소, 연봉, 직무를 한 번에 만족시키는 '원샷'의 기회는 생각보다 드물다. 나는 우선순위에 따라 하나씩 도장을 깨기로 했고, 그 첫 번째 선택이 바로 '직무의 전환'이었다.
창고 바닥에서 배운 데이터의 진실
나의 첫 커리어는 제조업 구매팀이었다. SCM(Supply Chain Management)은 흐름이 눈에 보이는 매력적인 영역이었지만, 현장은 늘 전쟁터에 가까웠다. 자재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생산 라인을 오가며 뛰어다니던 날들의 스트레스는 상당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시절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자산이 되었다.
구매 담당자로서 일하며 뼈아프게 배운 사실이 하나 있다. 시스템에 찍힌 '재고 숫자'와 창고에 쌓인 '실물 숫자'는 거의 항상 다르다는 현실이다.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 일하는 지금, 나는 그때의 경험이 단순한 업무 지식을 넘어 Data Cleaning(데이터 정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이라도 입력값이 오염되어 있다면 결과 역시 무의미하다는 'Garbage In, Garbage Out(GIGO)'의 원칙을, 나는 코드가 아닌 차가운 창고 바닥에서 먼저 몸소 먼저 배웠던 것이다.
점들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Connecting the Dots)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커리어의 점(Dot)들은 결국 연결된다. SAP 시스템에 입력한 데이터가 플래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해했던 SCM 도메인 지식은, 이제 고객의 비즈니스 케이스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AI 사이언티스트의 전문성으로 확장되었다.
대학원은 그 점들을 잇는 강력한 선이 되어주었다. 기술 그 자체보다도, '공부는 결국 스스로 하는 것'이라는 프레임을 잡게 해 주었고, 지식은 나눌 때 비로소 확장된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우게 했다. 무엇보다 내 세계관을 넓혀준 것은 함께 공부한 동료들이었다. 커리어 초반, '병아리'에 불과했던 나에게 귀감이 되어주었던 그들을 보며, 나 또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Next: 당신의 레모네이드를 응원하며
기술 변화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우리의 커리어는 이제 10년 단위가 아닌 더 짧은 주기로 변화할 것이다. 나는 이 변화의 시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과 '네트워크'라고 믿는다. AI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이지만, 결국 그 기술의 처음과 끝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때 대학원 등록금으로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를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른바 '껄무새'가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나는 이 비용을 '대학원 연금'이라 부르기로 했다. 부동산은 자산의 가치를 높여준다면, 이 연금은 나에게 '세계관의 확장'과 '회복탄력성'이라는 배당을 매달 지급한다. 그리고 최고의 수익률은, 역시 함께 성장하는 동료들이다.
비행기가 연착되던 불안한 꿈은 끝났다.
이제 나는 예측 불가능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나만의 레모네이드를 만드는 법을 배워 나가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어떤 선택을 하시든,
그 용기에 진심 어린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용어 풀이
숏티지(Shortage)
공급 부족으로 인해 자재·부품이 제때 확보되지 않는 상황
SCM (Supply Chain Management)
원자재 조달부터 생산, 물류, 재고 관리까지 이어지는 전체 공급망 관리 영역
ML (Machine Learning)
데이터를 기반으로 패턴을 학습해 예측·분류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인공지능 기술
Agentic AI
목표 설정, 계획 수립, 실행, 피드백을 반복하며 스스로 의사결정을 수행하는 AI 시스템
Data Cleaning(데이터 정제)
분석 이전 단계에서 오류·누락·중복·왜곡된 데이터를 바로잡는 작업
GIGO (Garbage In, Garbage Out)
잘못된 데이터가 입력되면, 결과 역시 신뢰할 수 없다는 데이터 분석의 기본 원칙
껄무새
이미 지나간 선택을 계속 떠올리며
“그때 ○○했더라면…” 하고 후회 섞인 가정을 반복하는 상태를 빗댄 표현
『다시, 학교로 간 직장인들』 릴레이 에세이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2017 IMMS 6기
전) 자동차 부품 제조업 구매 담당
현) Global Tech, SCM의 현장감과 AI의 기술력을 잇는 AI Scien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