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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인 Z Jan 04. 2021

이상형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남자



공공연하게 나의 이상형을 말할 때 제일 먼저 꼽는 조건이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남자’였다.


처음에는 좀 막연했는데,

그에 대한 이유를 요구받다 보니 생각이 구체화되어갔다.


대학을 다니면서 영화 일에 대한 많은 기대를 했었다.

다양한 관점을 가진 훌륭한 영화들을 보며,  

깨어있는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영감을 주고받고,

공통된 목표를 향해서 협업하는 것을 꿈꾸었다.

정말 근사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사회에서 요구하는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상아탑'의 정점에 있는 대학의 목적에 맞게 교육받았다.


그 기대가 깨진 건 졸업 시즌에 '취업계'를 내라는 교수님의 요구가 진심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다.

'교수평가제'의 연장선으로 영화과 교수의 실적에 학생들의 취업률이 반영이 되었다.

취업이라는 게 없는 예술학부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처리한 학교와 사회도 문제이지만

그걸 소신 없이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교수들도 불행하긴 마찬가지였다.

다양성을 무시한 채 빠른 성과를 바라는 사회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한다.


담당 교수의 실적을 깎아먹으며 졸업 후 4개월을 백수로 놀다가

첫 영화에 취업(?)을 했다.

내가 겪은 첫 현장은 4년을 배운 모든 배움이 이상일뿐이라는 걸 빠르게 알게 해 주었다.


이 집단은 다른 어느 집단 보다도 폐쇄적이었고,

결정권자의 의견에 이이를 제기하고 그가 맘이 상하면

문제의 잘잘못을 떠나서 발언한 이가 눈치가 없다고 평가받았다.

누군가 잘려서 나가는 걸 매 영화마다 경험했으니

해고가 비일비재했다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


일을 구할 때 면접을 보지만 결국은 예전에 같이 했던 이들을 통해 뒷조사를 한다.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고, 그 권위에 기대어 서로를 억압한다.

심지어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 또한 별 문제의식 없이

그건 감독의 취향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네가 입봉을 해서 바꾸라는 말은

그렇게 문제 제기하면 입봉 하지 못한다는 무언의 압박과도 같다.


10년을 버티며 달라지길 기대했지만, 많은 상처만 남았다.


어느 날 누가 나에게 영화판이 굴러가는 게 군대 같다고 말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 영화판에서 군대에서 요구하는 인간관계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을 찾고 싶었다.

이상형도 그에 맞게 바뀌어 갔다.


탈권위적이고, 모든 문제를 대화로 풀어가고, 남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는 그런 사람.


어느 날 한홍구가 쓴 <대한민국사>라는 책을 읽었다.

4권으로 이루어진 책의 3권에
대한민국 사병은 똥개인가_언제까지 “까라면 까”라고 강요할 것인가? 

라는 챕터가 있다.


“인격이 무시당한 경험, 남의 인격을 무시한 경험,
그 상처를 안고 매년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제복을 벗고 사회로 돌아온다.
인권 감수성의 하향 평준화가 군대에서 사회로 이어지고 있다.”



책에 실린 이 문장 덕분에 왜 대다수의 한국 남성들이

단체생활에 있어서 쉽게 불합리에 순응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다.

한국 영화판으로 좁혀도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으니 시스템의 부조리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여전히 못마땅하지만 알고 나니 덮어놓고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남성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에서 이해로 사고가 옮겨가야만 한다.

뭘 그렇게 쉽게 용서하나 싶겠지만

나는 활동가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며

더 이상 내가 사랑했던 걸 미워하며 아파하는 자아분열을 멈추고싶다.

주변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고 싶은 한 개인으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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