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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인 Z Dec 21. 2020

규칙 없음

통제와 규정은, 무능력한 직원에게나 필요한 것

    30대 후반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어른이 안 된 것 같은데 내 나이는 사회에서 중년이라고 지칭하는 연령대에 가까워졌다. 마지막으로 일한 곳에서 감독은 내게 '고인 물'이라고 말했고, 막내는 '라떼 누나'라고 불렀다. 


10년의 경력에 대한 평가 치고 너무 박한 거 아닌가? 아니, 사실 이 시스템 자체가 쉽게 저임금으로 대체할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해왔기 때문에 자기 목소리를 내는 고인금의 노동자는 불편한 존재일 것이다. 

그동안 영화계는 산업의 영역에 있지만 예술의 옷을 입고 더 앞장서서 '열정 페이'를  강요해왔다. 더군다나 감독을 꿈꾸는 연출부는 미래에 나의 영화를 제작해줄 PD, 투자자의 평판의 그늘에 있기 때문에 더욱이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가 힘들다.  


며칠 전, 친한 언니에게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집으로까지 찾아온 그에게 요즘의 나의 상황과 생각의 변화들을 들려주었다. 단호하게 영화일은 싫다고 말했지만 찾아와 준 그의 노력이 고마웠다.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진심을 나누면 된다는 인사이트와 함께 고민이 시작되었다. 


- 감독이 여성이다. 

- 조감독이 친한 사이고, 또한 여성이다.

- 감독이 '벡델 테스트'를 의식하고 있다. 

- 영화 시장의 다양성으로 나아가려는 시도에 동참하고 싶다. 

- 원작이 사회적으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취향의 다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재다. 

- 캐스팅된 주연 배우가 평소에 관심 있어했던 분이다. 

- 극장 상영이 목표가 아니라 지금 가장 핫한 'N' OTT 자체 제작 영화이다. 

- 탈도시를 계획했으니 돈을 좀 더 모아 둘 필요가 있다. 


적다 보니 기대감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영화계에도 드디어 '규칙 없음'을 실천할 수 있는 걸까 라는 희망마저 품게 되었다. 


며칠 뒤, 언니로 부터 연락이 왔다. 제작 실장으로부터 내가 전에 받았던 월급을 듣고 절대로 안된다는 피드백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 실장이 몇 년 전에 "스크립터는 막내 페이 다음으로 예산을 짜 놨기 때문에 절대 내가 받았던 페이는 맞춰 줄 수 없다" 고 말했던 이와 동인 인물이었다. 그 당시 감독 또한 스크립터를 독립된 포지션으로 조감독만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지만, 그 임금을 맞춰 줄 의지가 없었다. 오히려 페이가 안 맞다고 거절한 내 선택에 섭섭해했다. 그때는 '이 영화 말고 다른 거 하면 되지'라고 물러섰지만 이젠 짜증이 확 치솟았다. 타협할 의지가 1도 없는 사람과 언니가 싸웠다는 사실이 맘이 아팠고, 너무 쉽게 희망을 품은 나의 안일함에 화가 났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규칙 없음' 이 모토라는 플랫폼에서 제작하는 영화였지만, 그 하청 업체가 한국 영화계라는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렸다. 나는 언니가 다치지 않는 게 중요했고, 권위를 중시하는 세계에서 감독이 그걸 고칠 의지가 없다면 언니가 싸운다고 그를 이길 수 없으니 힘 빼지 말라는 말로 위로했다. 그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뺏기고 나니까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소속감에 대한 욕구는 쉽게 사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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