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여행의 아름다움
어느덧 마음을 나누게 된 한 배우와 여행을 가게 되었다.
실연 후에 혼자서 서핑하러 간다는 그의 모습이 불안해 보여 같이 가야 할 것 같았다.
나 또한 코로나로 인해서 집에만 있으면서 시나리오를 쓰는 게 답답하기도 했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약속을 하고 보니 목적지가 포항이었다.
서울에서 차로 4시간 거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일로 만난 사이라 약간의 벽이 있었는데, 그 시간을 혼자 운전할 그를 위해서 뭐든 준비해야만 할 것 같았다.
자동차 여행을 하는 일이 흔한 미국에선 "로드트립을 위한 질문지 리스트" 같은 걸 준비해서 떠난다.
이걸 떠올리곤 질문지를 검색하기 시작했지만 한국어로 된 질문지는 없었다.
결국 영어로 준비해서 갔다. (몇 달이 지난 지금 '세바시'에서 인생 질문 100이라는 걸 펀딩하고 있으니 꼭 사보시길 바란다.)
당일 아침에 그의 집으로 갔고, 어머님은 9첩 반상을 차려주셨다. 평소 아침을 먹지 않았지만 정말 맛있게 먹었다. 든든하게 속도 채웠고 기분 좋게 출발했다. 준비해 간 질문지가 모자랄 줄 알았는데 우린 할 말이 너무 많았다. 더듬더듬 번역을 해가며 평소에 그 누구도 질문하지 않았을 것 같은 질문을 하고 대답을 주고받으면서 속에 있던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의 제작사 대표가 텔레그램으로 성희롱을 했던 걸 말해주었다. 나도 그 제작사에서 만든 영화를 한 적도 있고, 각색고가 나오면 그 제작사 PD에게 보여줄 참이었기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사실 내 시나리오를 각색하고 있던 친구가 지인의 사례를 들어가며 그의 행실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겪은 그는 재능이 있었고, 나 또한 거기에 편승하고 싶었기에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그런 그의 성희롱이 정말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 더욱 낙심했다. 미투가 영화계를 휩쓴 뒤라 못 그럴 줄 알았다. 이젠 좀 안전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예전보단 눈치를 보았겠지만 권력과 위력의 문제가 사라지지 않은 구조에선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미투를 지지한 안희정이 김지은 씨에게 성폭력을 가했고, 박근혜 타도를 함께 외쳤던 그들도 본인이 기득권이 있는 곳에선 가해자였다. 펜스 룰을 치며 여성 연출부는 뽑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구인공고를 내는 이들도 문제의 본질을 흐리긴 마찬가지다.
첫 영화의 감독이 내가 그의 제자였을 때 했던 성추행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포항으로 가는 그 긴 시간 동안 문장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하지 못하고 오늘에서야 글로 적는다.
1박 2일로 정했던 여행이 4박 5일이 되었고, 같은 옷을 5일째 입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매일 밤을 불멍의 시간을 보냈다. 대화 중에 내 입에서 탈도시를 해서 집을 짓고, 영화계에서 벗어나 1인 창작을 시작하고, 책을 쓰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땐 그냥 내뱉은 말인 줄 알았는데 그날 이후로 하루하루 더 간절해졌다.
그는 내가 자신을 자살의 위험에서 구한 줄 알지만, 나 역시 그로 인해 구원받았다.
감독이 되는 걸 실패했다고 내 인생이 실패한 게 아니란 걸 알아야 한다.
이제 진짜 제발 내려놓자. 제발 도망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