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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인 Z Feb 02. 2021

미투 이후의 영화계

부득이하게 남자분을 찾고 있습니다

2018년 1월 29일 서지현 검사의 폭로.


2018년 3월 5일 김지은 씨의 안희정 성폭력 가해 폭로.


영화계도 다르지 않았다.

일부 가해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몇몇은 재판에 승소해서 다시금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정말 그걸로 끝인가?

재판에 이기면 그들의 여성 혐오와 죄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일까?

이제 이런 문제가 불거졌으니 사회는 정말 평등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역차별을 끝내고 코로나 시대에 우선 생존문제부터 해결해야 하는 걸까?


영화인들끼리 구인 구직을 위해 운영하는 연출부 밴드가 있다.

올라오는 구인 글 중에

영화 성격상 남자 연출 부만 구한다는 글이 미투 이후에 심심찮게 올라왔다.

예전엔 아예 그런 언급조차 없이 당연한 듯 남성만 뽑았으니 발전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모집인원 : 1명 (부득이하게 남자분을 찾고 있습니다.)


2021년에 이 글을 또 보게 되다니...

연출팀 밴드를 탈퇴를 하던가 해야지 정신 건강에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

세상이 더 좋아지는 줄 알았는데,

희망은 빠른 속도로 사그라들었다.


코로나 시대에 영화계는 다들 알다시피 정말 어렵다.

구인 구직의 난에서 가장 약자인 여성들의 설 자리는 더 줄어들었고,

온갖 펜스 룰과 여성 혐오의 발언들에 격분하는 건

생존 앞에선

사치와도 같아 보였다.

저 글을 쓴 사람이 내가 아는 여성분이라 더 맘이 복잡해졌다.


작년에 함께 여행을 간 한 배우의 고백 덕분에 그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한 용기를 내었다.

그땐 영화계를 탈출하면 마냥 홀가분해질 줄 알았는데,

구인 구직 글을 보고 가슴이 쓰라렸다.


생존의 기로에서

당연한 듯 가장 약한 자들부터 버려졌다.


미투 이후에도 여전히 캐스팅을 무기로

제작사 대표는 성희롱을 일삼았고,

대외적으로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여성의 인권과 영화 발전을 위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더 이상 모른 척 있을 수도 없었고,

전혀 홀가분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내가 더 많은 감정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스크립터 업무를 이어 왔던 것도

그나마 여성 영화인에게 여성 쿼터가 없는 유일한 포지션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을 잘해서 공백기 없이 계속 일을 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대다수의 남성 연출부들이 하기 꺼리는 포지션이 스크립터이다.

감독의 수발과 비서의 업무도 하기를 강요받기 때문이다.


과중한 업무 이외에도 감독의 기분을 맞춰주는 걸 잘하는 것도

스크립터에게 당연한 자질로 여겨졌다.

그렇게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눈치껏 기분 맞춰주지 못하면

존재가 거슬린다는 말로 자존감이 번번이 무너지는 것도 견뎌야 했다.


나는 그래도 감독이 되고 싶었고,

스크립터라는 포지션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볼 수 있는 자리였기에

배운다는 마음으로 꾹꾹 참았다.


콘티를 짜는 일을 괴로워하는 감독들도 많이 보았지만

콘티 짤 때가 가장 즐거웠고,

지금까지 보고 들은 모든 걸 레퍼런스 삼아서

이야기를 하는 그 시간이 좋았다.


감독이 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나보다 어렸던 한 여성 감독의 일을 하게 되었다.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이가 여성이니 차별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린 여자가 감독이 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남자 촬영 퍼스트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그 누구보다 모니터를 보고 확인해야 하는 감독에게

모니터가 안 나오면 현장 옆에 있는 모니터를 와서 보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당장이라도 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분쟁을 싫어했던 감독은 그의 말에 따라

카메라 옆에서 서서 모니터를 보고 배우 동선을 지시했다.


그 상황의 부당함이 어이가 없었고,

한편으로 내 미래일지도 모르는 상황에 불안했다.

과하게 격분했고,

번번이 그와 싸웠다.


모니터 스테이션 세팅을 연출팀과 스크립터가 하는 경우는 우리나라 영화계뿐이다.

심지어 한국 드라마와 CF 촬영 장에서도 모니터 세팅은 촬영팀의 업무이다.

필름으로 촬영하던 시절

뷰파인더로 앵글을 볼 수 있는 건 촬영감독 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로만 들었다.

그땐 감독이 모니터를 볼 권한이 없었다고 한다.

그 시절의 유물이 아직까지 전해져 내려와 화석이 되어 일부 촬영팀들은

그 알량한 권력으로 촬영장에서 군림하곤 했다.

카메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연출팀은

모니터를 세팅하면서 굽신거리며 촬영팀의 도움을 갈구해야 했고,

그 틈을 무기 삼아 갑질을 했다.

연출팀의 가장 하위 직책인 친구를 자신들의 업무에 부려먹었고,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니 여성인 감독한테까지 함부로 대했다.


어쩌면 촬영팀 한 명의 인건비보다 연출팀의 인건비가 무척 싸기 때문에

그 일이 떠 넘어와서 관행처럼 굳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여성과 페미니즘의 문제는

약자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여성의 인권이나 직책이 아무리 높아져도

약한 고리에 있는 사람은 성별을 떠나서 차별받고 억압받을 수밖에 없다.


끝없이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 무례하게 굴고 착취하는 인간의 악함에 연민마저 느껴진다.

너와 나를 끝없이 위아래로 구분하는 세상에선

영원한 승자도 자도 없이 서로를 뜯어먹는 괴물들만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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