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다움은 없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좀 지쳐있었던 것 같다.
더 이상 일이 즐겁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꾸역꾸역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여성 대표에 여성 감독에 여성이 매인 캐릭터인 영화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다.
나는 매번 그렇듯이 쉽게 감동했고 큰 기대를 했다.
결과적으로 인생을 함께 할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만큼 감정이입을 더 많이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다.
밖을 나가면 하루에 한 번 이상 볼 수 있는 배우가 캐스팅이 되었다.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유명한 그였지만
남성 주인공인 영화만 잘된다고 생각하는 영화계에서
그 혼자만의 힘으로 투자받기가 힘들었다.
출연료의 일부를 희생하며 애썼지만
그 또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회사 식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독단적인 선택을 할 순 없었다.
어느 날 그는 그와 밥을 먹고 싶다는 투자사들의 말에 그 자리에 나갔다.
애초에 그런 자리가 존재해서는 안됐지만
그런 자리를 거절하지 않고 만든 성별만 여자인 제작사 대표와
거기서 또 그에게 술을 따르게 시키는 투자사 놈들과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입봉 하는 감독과
인성이 좋아 웃으며 넘기려 했던 그의 상황을 들었을 때
정말 분노했지만, 한편으론 처참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달랐을까?
내게 그 자리를 걷어차고 나올 용기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이뤄야 할 목표와 생계 앞에서 모두가 약자였고 괴물이었다.
우리가 인간이 되기는 힘들지만 괴물이 되지 말자는 영화 속 대사는 대사로 끝나버렸고
나는 기꺼이 괴물이 되려 애써왔다.
정의당의 김종철 대표가 직위 해제되고,
정의당의 존패를 놓고 많은 사람들이 왈가왈부한다.
이쯤 되니까 때 되면 등장하는 코스 요리인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나마 정의당이니까 이 사태를 안 묻고 대표를 날려버릴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용기에 지지를 보낸다.
인권침해와 성차별은 저 멀리 생계 문제가 어려운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매일의 생활에서 늘 발생하는 문제다.
그만큼 일상적인 폭력과 차별에 대한 인식의 수준이 낮아서
그 문제에 대해 해결하자고 있는 사람들조차
같이 일하는 동료를 평등하게 보지 않고 있다는 게 더 크고 시급한 문제로 보인다.
권력의 속성상 상하관계를 공고하게 유지하는 게 더 유리하니
이런 일은 비일비재할 것이다.
대의를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고 여기면
이러한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다.
잘못을 하면 대통령도 감옥에 가고
당대표도 내려와야 하고
경제 부흥의 대의가 있는 이재용도 감옥에 가는 게 당연하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아도
차별의 순간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나에게 입봉은 너무나 간절한 문제였고,
잠깐의 희생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눈감아 버리는 게 더 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 발만 나아가면 더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다.
아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해도
당장은 속이 후련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신념과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 일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흔들 권리는 내게 없었다.
그래서 그 배우도 웃으며 견디었을 것이다.
더 이상 이 시스템의 톱니바퀴에서 볼트나 조이고 있을게 아니라
판을 다시 짜 보자.
뒤늦게 올라가려는 목표를 버리니
이제야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당장의 성과가 없고, 생계의 위협이 따르겠지만
정의당의 결정과 같은 선택이 점점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수직적인 구조를 바꾸지 않는 이상
차별과 억압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일들이다.
눈앞의 이익을 놓고 손실을 따지지만
그 속에서 무너져가는 인간성과
사람들의 죽음으로 인한 손실을
정말 수치로 계량화 할 수 있는 걸까?
이러한 선택들이 모여서 모두가 모두를 착취하는 구조로 가면
그냥 제로섬 게임일 수밖에 없다.
자정의 목소리와 느리지만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선택의 합이 모여
서로를 착취하지 않고, 연대하며, 더 가지려 머리 쓰지 않고,
마음만 곱게 써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간절히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