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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직스쿨 김영학 Nov 14. 2018

능동적, 수동적, 적극적, 소극적
그 속에서 허우적

우리 안에 살고 있는 5개의 적(敵)에서 기준을 잡는 법

지면 관계상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어, 담지 못한 이야기 등을 추가로 하거나, 그 이상의 생각 등을 적고자 합니다. 되도록 원문은 해당 사이트에 가서 보시고, 뒷 이야기는 브런치에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구독해주시는 분들과 풍성한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직장생활의 시작과 끝 사이에 4개의 적(敵)에 갇혀서 산다. 그 4개의 적은 우리의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능동적과 수동적 사이, 적극적과 소극적 사이에서 허우적대면서 누군가의 한 마디에 파르르 떨기도 한다. 목표는 오직 하나다. 자신이 결코 수동적이거나 소극적인 태도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증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아무리 열심히 하려고 해도, 열심히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오직 “잘해야 한다”뿐이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괜찮은 결과를 냈지만, 이제는 ‘과정’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다.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 같지만, 정작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 마치 나를 근무시간 동안만이라도 철저하게 감시하는 것과 같은 평가를 한다.


이 내용은 실제 10년이 조금 넘는 필자의 직장생활 동안에 받았던 느낌이다. 분명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업무에 임했다고 자부했는데 그때마다 돌아온 정량 및 정성적 평가는 가혹했다. 나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진심 어린 충고도 물론 있었지만, 각자가 자기들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면서 보이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간혹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상사들은 신(神)일까. 어떻게 내가 하는 일의 과정과 결과를 모두 예측하지…” 하고 말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처럼 가까울 수 없는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쳐간 조직의 리더들은 소위 리더답지 못한 행동으로 실망감을 안겼다. 왜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꼬투리를 잡고, 늘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말이다.


그리고 2년이 넘도록 이직스쿨을 운영하면서 찾아온 이들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리더답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리더가 쳐놓은 4개의 적으로 둘러싸인 구간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아마도 평생을 두고 회사를 들어가거나 옮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들 대부분이 겪어야 하는 필수 딜레마 인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문제 삼지 않으면, 결코 자신이 그런 상태인지 잘 모르고, 결국 늪처럼 서서히 빨려 들어가 나오지 못할지 모른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좀비처럼’ 조직에 머물면서 나도 조직도 함께 병들어 간다.


(본문에서 계속)



덧붙이는 글
< 스스로를 설득하는 법 >
 

자기 주도에 의한 삶, 몇 해전 명사가 '자신만의 삶'을 사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열심히 강조했다. 말은 멋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자신에 의한 삶'을 살지 않았던 적이 없었는가. 따지고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 삶부터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자신만의 삶을 살지 못하는 순간 및 분야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너무나 많아 헤아리기도 어렵지만, 대부분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해 나타난 현상이라 볼 수 있었다. 


누군가의 영향에 의해, 귀가 얇든 워낙 크고 깊은 영향에 의한 것이든 간에, 어찌 됐든 그 결정은 나 스스로가 내린 결과물이었다. 이른바 내적 갈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어떤 방향으로 결정을 내릴지 선택하고, 실행함으로써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지금은 위와 같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의 자세가 그동안의 경험 때문에 노련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갈등의 상황은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때마다 갈등을 어떻게 해소하는지에 대한 노하우를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앞선 칼럼에서는 이를 '적극적 vs 소극적', '능동적 vs 수동적'이라는 말로 내적 갈등의 구간을 설명했다. 앞의 갈팡질팡함은 둘 사이에 무언가를 택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의사결정상 항로(방향성)에 대한 정리였다. 당연히 그 과정상의 '설득'은 필수적이다. 

설득 보다는 납득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납득은 왠지 모를 '수동적, 소극적'인 느낌이다 

아마도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은 그리 길게 가지 않을 것이다. 살면서 굳이 자신을 설득하는 노력까지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생각보다 각자가 가진 관성(나아가려는 힘)을 멈추거나, 방향을 바꾸거나 하는  아마도 그 설득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의 방향을 반대로 돌릴 때에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중에 최고로 힘든 것은 「생각으로만 갖고 있다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굳이 하지 않는 것이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지식근로자의 모습이라고 피터 드러커는 역설했다. 그만큼 우리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많이 벌인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는 '필요(비용)'하다의 개념보다는 '투자'의 개념으로 명분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명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① 명분(名分) "일을 꾀할 때 내세우는 구실이나 이유 따위"

② 명분(命分)은 이미 정하여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天運)

물론 쓰는 의미로는 ①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설득할 때는 ②을 활용한다. 다소 억지스러울지 모르지만, 생각보다 효과가 좋다. "나는 이런 운명이다."라고 스스로에게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글을 쓸 때에도, 매일 아침 헬스장을 갈 때도, 먹고 싶은 것을 참을 때에도,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에도, 내가 선택한 운명(運命)이니, ② 명분(命分)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맞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운다. 


이때 주의할 것은 무언가 빨리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닦달하지 않는 것이다. 

운명이라면, 스스로가 그렇게 될 운명이라면 멈추지만 않는다면 바라는 대로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강력한 제재 등을 처음부터 사용하기보다는, '크고 작은 행동을 했다'는 것에 더욱 많은 의미를 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습관화되었을 때, 그때부터 Before & After로 나누어 스스로를 평가하고 상/벌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루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도, 오랫동안 어떤 특정한 활동을 하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100m 달리기를 중간에 거의 휴식 없이 인터벌로 달려왔다면, 지금은 중간중간에 쉬기도 하면서 풍경도 보고, 발 밑도 보면서 나름 풍경과 함께 하는 사람을 둘러보게 되었다. 


아마도 스스로를 설득보다는 '납득'이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로 부터 받은 영향을 어떻게 해서든지 스스로에게 끼워 맞추는데 노력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 자신이 바라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도 적고, 심지어 그걸 진정으로 바랬는지 지나고 보면 잘 모를 수도 있다. 특히, 단기에 무언가 이루려고 하는 것 말이다. 그 보다는 오래도록 즐기면서 성장을 통해 성숙해지는 것을 선택하도록 해보자. 그러면 납득보다는 설득으로서 내가 받았던 영향을 또 다른 타인에게 전해줄 수 있는 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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