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까닭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까닭>, 한용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사랑을 경험한다.
우리의 지각이 발달하기 전, 이미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자신을 향한 기쁨과 설렘 환희와 행복의 기운을 듬뿍 받는다. 그런 상태를 아주 초기의 태아가 바로 느낄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서서히 성장하면서 부모가 보내는 사랑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미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느끼는 이런 감정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만큼의 큰 영향력을 갖지 않을까 싶다.
한 생명을 잉태한다는 것은 두 사람의 사랑이 무르익어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달콤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함께 그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지만, 두 사람은 깊은 사랑의 힘이 장밋빛의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 믿는다. 이 축복은 고스란히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폭넓은 사랑은 정말 많은 의미를 갖는다. 사랑은 깊은 상호 인격적인 애정에서 단순한 즐거움까지를 아울러, 강하며 긍정적으로 경험된 감정적 정신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즉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모성애와 부성애, 가족 또는 연인과의 사랑을 들 수 있다. 물건이나 동물에 대해 아끼는 마음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고, 어떻게 보면 집착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랑의 울타리 안에 불안과 불행, 공포가 행복을 짓누르고 있다면 사랑이 아니다.
한용운이 말한 사랑의 까닭은 누구나 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의 사랑이 아닌, 외롭고 초라하며 아픔을 겪는 상황까지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 아름답고 멋진 사람을 보면 좋아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하지만 망가지고 추한 상태에서도 좋아할 수 있느냔 말이다. 또 큰 문제없이 행복하던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것까지 감내하며 곁에 함께 있어줄 수 있느냔 말이다. 건강하던 몸이 늙고 병들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을 때조차도 기꺼이 사랑한다고 말해 줄 수 있느냔 말이다. 그렇기에 이 모든 상황에서도 사랑으로 자신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까닭은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한다.
사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이다. 특정한 조건이나 일시적인 감정, 불안이나 우울의 해소 등 상황에 따라 사랑의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깊이와 너비를 갖춘 아늑하고 따뜻한 편안함이 아닐까? 사랑은 그 사람에 대한 믿음과 각오를 통해 깊어지고 넓어진다. 깊고 넓은 사랑은 영혼으로 이어진 사랑이고 본질적인 사랑이다. 힘들고 늙고 병든 모습은 겉으로 드러난 형태일 뿐이지 사랑하는 대상의 핵심적인 영혼은 변함이 없다.
영혼으로 이어진 사랑을 하는 사람은 세상이 더없이 행복하고 평온하다. 삶이 아늑한 에너지로 가득 찬다. 고독의 시간을 통해 내면을 차분히 살피고 본질적인 사랑을 발견하여,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만해 한용운, 1879-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