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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와 연륜과 관록

나이가 뭐길래

by 타조

"야, 너 몇 살이야?"

소리치듯 외친 질문의 내용과 앳된 목소리의 부조화, 다소 어눌한 발음, 그 의미와 어울리지 않는 장소의 모순이 무척 신선했다. 의미에 담긴 상황의 심각성보다 전체적인 상황의 맥락적 괴리감이 일종의 해학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주변의 모든 감각이 무뎌지며 세상이 거대한 한 편의 희극처럼 느껴졌다.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오려 했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입꼬리까지 도무지 막을 수 없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유쾌함이 봇물 터지듯 샘솟기 시작했다. 기어코 앙다문 입이 벌어지며 입 밖으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아이가 경사면을 거꾸로 걸어 오르기 위해 미끄럼틀 끝에 서 있었고 다른 아이는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린 채 팔짱을 끼고 미끄럼틀 위에 서 있었다. 어린 두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하기 위해 대치하던 중 미끄럼틀 위에서 다소 거만한 자세를 하고 있던 아이가 다시 한번 앳된 목소리와 어눌한 발음으로 소리치듯 외쳤다.

"너, 몇 살이냐고? 나 다섯 살이야!"


경사면을 타고 내려오는 미끄럼틀 이용 방법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가 미끄럼틀은 경사면을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을 일반적인 이용 방법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고 경사면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꾸짖지는 않는다. 위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사람이 없으면 아래에서 거꾸로 올라가는 이용 방법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보통 경사면 위에 사람이 있을 때에는 아래에 있는 사람이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맞지만 어린아이는 암묵적인 규칙이 익숙치 않을 따름이다.


미끄럼틀의 경사면은 아이들의 도전의식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이들은 종종 미끄럼틀을 거꾸로 걸어 오르려고 한다. 어떤 역경을 딛고 이겨내는 양 계속해서 미끄러져도 기어코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경사면에서 여러 번 미끄러져도 끝내 미끄럼틀 위에 오르고야 만다. 그때 아이들은 일종의 성취감과 희열을 느낀다.


가족들이 식당에 방문하면 어린아이들은 지루해하기 마련이다.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아이들은 소란을 피우거나 뛰어다니며 말썽을 일으킨다. 보호자가 적절한 대처를 미처 하기도 전에 혹은 방관하는 사이에 발생하는 일로 어린이혐오가 발생하고 노키드존이 형성되며 사회적 문제로 불거진다.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식당은 훌륭한 상생의 장소가 된다. 아이들이 놀이 공간에서 노는 동안 어른들은 원만한 대화를 나누며 조금의 휴식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놀이 공간도 돌발상황은 언제든 발생한다. 보호자가 놀이 공간에 함께 머물면서 보살펴주어야 한다.


놀이 공간 바로 옆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나는 두 아이가 마주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계속 지켜보았다. 다행히도 미끄럼틀 아래에 있는 아이의 아빠가 상황 설명을 아이에게 차분하게 해 주었고 아이도 별다른 고집을 부리지 않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너무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던 것 같았다. 상황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런데 미끄럼틀 위에서 소리친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다소 충격적이다. 다섯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누구에게 들은 말이며 어떤 뜻으로 쓰이는지 이해하고 있을까?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부모를 확대하면 가족이라는 말로 대체해도 무방할 것 같다.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로 넓게 바라보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이를 통해서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다. 가족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아이가 생활하는 사회, 어쩌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될 수도 있는 어떤 곳에서 나이 차이의 의미를 이해한 것을 아닐까 싶다. 적어도 아이 스스로 생각해서 사용한 표현은 아니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이로 서열을 따지는 우리의 역사는 꽤나 깊다. 특히 비슷한 문화권을 형성하는 동아시아에서 공자의 유교사상이 큰 영향을 끼쳤다.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유교는 우리나라에서 국가의 근본사상이 되어 나라의 기본질서를 지탱하는 뿌리가 되었다. 국가존립의 근본이 되는 유교사상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나이를 유별나게 따지는 현상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유교사상에서의 나이 개념은 효의 출발점이다. 유교의 핵심 덕목 중 첫째는 효, 즉 부모에 대한 공경과 봉양이다. 나이가 많은 사람, 특히 부모와 조부모는 하늘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연령이 높을수록 도덕적 권위도 함께 인정받았다.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쌓인 어른의 지혜와 경험을 존경하면서 연륜, 즉 살아온 세월 자체를 지혜와 경험의 집약체라고 생각하며 받들기에 이르렀다. 공자는 논어에서 "효는 곧 천리(天理)"라고 했다. 또 유교는 장유유서라는 말로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서열 구조를 뒷받침하는 논리를 펼친다. 장유유서란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마땅한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유교의 핵심 원리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수양을 쌓고 도를 체득해 가는 과정의 깊이가 더해진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나이가 들면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라는 믿음 말이다. 그리하여 관직에서도 연령이 지위와 연결되었고, 나이 든 사람은 더 많은 경험과 지혜를 가진 자로서 존중받았다. 군신관계, 부자관계, 스승과 제자 관계도 모두 연장자 중심의 수직 관계로 형성되었다. 유교에서 나이는 단지 숫자가 아니라, 도덕적 자격, 인간관계의 방향, 사회적 위치를 결정짓는 열쇠였다.


다섯 살 아이가 경험과 연륜, 관록의 의미에서 나이를 들먹인 게 아닐 것이다. 그저 나이만 먹으면 어른 대접을 받고 싶은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을 그대로 옮겨 옮겨 듣고 한 말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 아랫사람은 알아서 기어 다니라는 식의 표현은 분명 어른 같지 않은 어른의 입에서 시작된 말일 것이다. 진정한 어른이라면 생각이 짧은 상대의 나이를 확인하는 대신 깨달음을 내리지 않았을까?


사회적 질서가 망가지는 일은 막아야겠지만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모든 것에 양보를 받고 대접받으려는 심보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갑질이 아닐까? 연령을 떠나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존경과 예우를 갖추고 어린 사람을 존중하면서 서로 어우러져야 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일 것이다.


이럴 땐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등하게 우정을 쌓는 머나먼 땅의 문화도 우리 사회의 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온고지신이라 했던가?


사진: UnsplashAisiri Iyeng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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