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이야기는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하면서 다시 만난 한 인도 가족과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다.
인도에서 처음 살았던 집은 주택 집의 2층이었다. 주인집이 1층과 2층의 반을 쓰고 우리가 2층의 반을 사용했다. 방 2개에 작은 부엌이 있는 아담한 집이었다. 집주인은 은퇴한 의사 노부부였다. 늦게 결혼한 노부부에겐 막 대학을 졸업한 쌍둥이 딸이 있었다. 지병을 앓고 있던 아저씨는 투석을 하셨고 나날이 쇠약해 가고 있었다.
처음 이 집에 살 땐 인도 문화를 잘 몰라 집주인 아주머니와 많이 부딪혔다. 시시때때로 우리 집에 불쑥 들어와서 자기 집처럼 참견하고 잔소리하는 통에 빨리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에 딸들은 취업해서 바빠지기 시작했고, 아저씨의 병은 깊어져 걷지도 못하게 되었다. 매일 투석하러 가는 일이 큰 고충이었다. 아내와 함께 시간이 될 때마다 아저씨가 투석하러 가는 것을 도왔다. 아내는 딱 1년 전쯤 돌아가신 아버지와 같은 병을 앓고 계신 아저씨를 통해 아버지를 투영했다. 인도에 사느라 옆에 있어드리지 못했던 마음 한 켠의 응어리라도 풀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내는 둘째 임신 중 입덧과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아줌마에게 부비기 시작했다.
그 집에 산지 2년쯤 지난 1월 초 어느 저녁, 주인집에서 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다급히 도움을 요청하러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와 급하게 뛰어 내려가니 아저씨에게 심장 쇼크가 왔고, 의사인 아주머니가 응급처치를 해서 간신히 호흡이 돌아온 상태였다. 의사이지만 자기 남편의 응급 상황 앞에서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내가 수발을 들고 나는 흥분한 딸과 아주머니를 진정시키고 함께 기도했다.
아저씨는 아내의 무릎을 베고 잠시 잠이 들었다. 그리곤 몇십 분 후 아내의 무릎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이제 스물몇 살 어린 쌍둥이 딸들과 우리는 아들 부부처럼 인도 장례 절차를 진행했다. 한 달 전 아저씨의 생일날 내가 찍어드렸던 사진이 영정 사진이 되었고, 그 사진은 지금도 이 집 거실에 걸려있다. 인도 장례에선 장지로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고인에게 아들이 신발을 신기는 풍습이 있다. 아주머니는 내게 그 일을 부탁했고, 모든 장례 절차를 함께 했다. 그리곤 그들과 가족이 되었다.
4년 만의 만남. 아내를 보자마자 쌍둥이 딸들과 마미라고 부르는 아주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함께 노래 부르고 인도 집밥을 먹으며 언젠가 또다시 볼 날을 기약했다. 다음엔 한국에서도 볼 수 있기를 소망하며...
아저씨의 마지막 생일에 아내와 함께 내가 찍어드렸던 사진은 영정 사진이 되어 지금도 이 집에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