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내가 원하는 것 사이에 당신이 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보게 된 연극 “앨리펀트 송”
연극의 줄거리를 간단히 설명해보면, 크리스마스 이브 날, 어느 정신병원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한 명의 정신과 의사가 사라진다.
최근 이 병원의 원장으로 부임한 그린버그는 의사를 찾기 위해 바로 전날 의사가 사라지기 전까지 면담을 했던 환자 “마이클”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려 한다. 이에 간호사 피터슨은 그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라며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그린버그는 마이클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려 하지만 장난스러운 농담만 던지는 마이클에게서 그런 정보를 얻기 쉽지 않아 보이고, 피터슨도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과정을 그리는 연극이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전반적으로 이 연극은 “편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타인을 선입견에 근거해 판단하고 결국 그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은 그런 기준들에 의해 분류되어 본질을 상실한다.
연극의 배경이 정신병원이 된 것도 아마 편견과 고정관념이 가장 강하게 부여되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 같다.
극 중 마이클의 대사가 인상 깊었는데, 대략 “차트를 읽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없다.”라는 내용이었다.
정신과 병동에 입원한 사람들을 면담하다 보면 짧은 시간 안에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얻기 위해 미리 정리된 차트를 읽고 들어가게 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효율적인 방식일 순 있지만 정확한 방식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을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어떠한 질병을 가진 사람으로 낙인찍고, 그 사람이 하든 모든 말과 행동을 그러한 질병에서 파생된 것으로 판단해 좀 더 본질적이고 객관적인 내면을 바라보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나와 내가 원하는 것 사이에 당신이 있다.” 여기서의 나는 정신과 환자인 마이클이고 당신은 정신과 의사인 그린버드이지만, 결국 나와 당신은 내가 될 수도 있고 여러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라도 가능하다면 잠시 나의 판단을 중지해보고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깨끗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볼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