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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 제이 Apr 02. 2020

진해 해군사령부 본관

아마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1996년 이 맘 때였으리라. 나는 벚꽃이 만발할 무렵에 진해 해군 작전사령부로 두 달간의 파견을 나갔다. 공군 연락장교라는 직책으로 김해 대저동 공군관사에서 아침 일찍 흰색 세피아를 몰고

김해공항 남쪽 산업도로를 타고 내려가 명지를 지나 지금의 녹산 산업단지 쪽으로 난 도로를 타고 진해 쪽으로 내달렸다. 지나는 길에는 지금의 STX 조선소에 이름이 달랐던 웅동 조선소가 있었고 그렇게 국도를 내달리다 보면 어느덧 진해 해군 작전 사령부에 진입할 수 있었다.


진해 해작사에 처음 들어선 순간 나는 내가 해군 사관학교를 나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이곳은 전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는 마치 유럽 어느 왕실의 Botanic Garden 같은 느낌이다.

울창한 정원수들 사이로 일제시대에 지어진 3층 근대 건물들이 그 당시에도 실제 사용되고 있었다.

진해 기지는 완벽한 요새다. 북쪽은 장복산으로 두텁게 가려져 있고 굽어진 해안선으로 인해 외해에서 항구를 바라보아도 정박한 해군의 함정들이 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근무하던 곳은 사령부 건물의 2층에 위치했다.

2층에 올라가 복도를 걷던 느낌을 아직도 선명히 귀로 기억한다.  


'삐걱, 삐걱'

오래된 일본식 목재 건물의 다다미 복도. 이 삐걱거리던 나무 바닥의 느낌을 몇 년 전 일본 오사카 성을 방문했을 때 똑같이 발견했다. 성주를 암살하기 위해 밤낮없이 자객들이 들이닥치던 혼란한 시절에 일부러 목재에 틈을 두어 어슷하게 연결해서 누구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끼기긱' 소리가 나게 했단다.

그 소리가 진해의 사령부 건물에서도 들렸다.


진해 해작사는  오래된 역사적 장소가 많이 남아 있는 박물관 같았다. 기지 내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아직도 하얀 침대 시트가 반듯하게 덮여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을 만날 수도 있었다.


그 해에는 그곳에서 내다본 진해 외항에 러시아에서 고철로 수입한 '민스크' 항공모함이 어찌 처리할지 모른 채 길을 잃고 떠 있었다. 이후에 동남아로 고철로 팔려갈 때까지 진해항의 해군들에게는 색다른 추억을 남겨주었다.


4월 진해 군항제때 공군 연락장교로 진해에 파견을 나가다니,  그러고 보면 나는 운이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매일 아침 출퇴근하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그 직전 해에 을지훈련 동안 용산에서 워게임을 하며 만난 해사 출신 UDT 선배의 도움으로 군항제 동안에는 웅천항에 있던 영외자 숙소를 얻어 아직 신혼이었던 아내까지 데려와 같이 지낼 수 있었으니  그해 4월 진해 군항제를 오롯이 즐겼다고 두고두고 자랑을 하게 되었다.


철학관을 한다는 사람을 만났던 것도 그 맘 때였다. 하루는 아침마다 김해에서 진해까지 두 시간가량 걸리는 돌아가는 루트의 시간을 줄일 요량으로 대저동에서 진해 쪽으로 바로 이어지는 거친 산길을 타고 넘어가고 있었다.

산길을 앞둔 초입에서 아침 7시 정도가 되었을까  싶은 시각에 중년의 남자가 혼자서 산을 넘고 있었다.

그의 옆에 바로 차를 세웠다. 젊어서 별로 겁이 없었나 보다. ㅎㅎ


"어디까지 가시는데 이 산 길을 혼자서 올라가세요?"

"산 넘어 진해에 갑니다."

성인의 발걸음으로도 족히 서너 시간을 잡아야 할 산길을 그것도 너무 이른 시간에 걸어서 산을 넘는 이 기이한 사내를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서 그를 차에 태웠다.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지는 모르지만 오늘 저를 만나 운이 좋으셨습니다. 공짜로 차를 태워드리는 것이니 차비라 치시고 그 사정이나 한번 들어볼까요?."

"그럽시다. 나는 철학관을 하는 사람 이외다."

"그럼 잘 되었습니다. 차비라고 치시고 제 관상을 한번 봐주시면 어떨까요?"

사복을 입었지만 짧은 장교 머리를 한 나를 한번 쓱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군인이시네요."

"에이 제 머리가 짧아서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어요. 그건 너무 쉽습니다. ㅋㅋ"

이 말에 그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는

"아뇨. 아뇨. 지금 군인이냐고 묻는 겁니다. 군인이 맞으세요?"

"예, 예. 군인입니다. 지금 해작사에 근무를 하러 갑니다."

이 말에 그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더니

"다행입니다. 당신은 군대에 가야 운이 펴는 사람입니다. 바로 있어야 할 곳에 제대로 가신 겁니다."


그날 아침 진해로 가던 길에 낯선 행인에게 베푼 호의가 작은 씨앗이 되었던지 그 이후 나의 군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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