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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 제이 Nov 21. 2019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아버지에게 배운 것 중 하나가, 계약서의 내용이 이해가 안 되면 싸인을 미루라는 겁니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공부해서 이해될 때까지 싸인하지 않을 겁니다."

오디오 북으로 들었던 어느 영문소설에 어린 주인공이 무리하게 유산상속과 관련한 서류에 사인을 요구하는 삼촌에게 하던 얘기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 판단이 안 되면 그냥 가만히 노래라도 부르면서 기다려. 네가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아. 대부분 비상은 아주 시간이 많아. 서두르지 말아야 해."


경력이 미천한 젊은 조종사 시절부터 늘 듣던 선배들이 귀에 못이 앉도록 들려주던 비상이 걸린 항공기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최고 원칙입니다.


"판단이 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마라."


미국에서 비상을 선포하고 RADIO에 비명을 질러 대며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자가용 조종사에게 관제사가 얘기했다는군요.


"손발 다 때고 아무것도 하지 마. 그리고 기다려봐."


조언대로 한 젊은 조종사는 곧 항공기의 컨트롤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400명에 이르는 승객의 목숨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는 에어라인 기장에게도 위의 룰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상황판단이 컴퓨터처럼 바로바로 되는 날도 있지만, 간혹 안갯속에 서 있는 것처럼 갑자기 발생한 상황에서 머리가 하얗게 되는 일을 사람인 이상 겪기도 합니다.


기장승급 중 시뮬레이터 평가에서 시스템 페일이 발생하자, 어느 영국인 여자 기장승급자가 부기장에게 했다는 말


"내게 한 5분만 시간을 줄래? 내가 준비되면 그때 우리 어떻게 할지 같이 얘기하자."


그리고 그녀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혼자서 한참을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시간을 보낸 후 5분이 다 되어서는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부기장을 바라보며


"나 이제 준비된 것 같아. 문제가 뭐였지?"


그날 그녀에게 자신이 평가 최고 점수를 주었다고 자랑하던 어느 교관도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의 아에로플로트 사고를 바라보는 조종사들의 관심은 그들이 겪었다는 LIGHTENING STRIKE 나 RADIO FAILURE, HARD LANDING 등 이런 세부적인 일이 아닙니다.


과연 그가 비상이 발생하고 30분도 안 되는 시간에 항공기를 바로 돌려 내려야 할 만큼 상황이 급박했느냐는 것입니다.


이 물음의 결과에 따라 그는 35명이나 살린 영웅이 되거나 반대로 살릴 수 있었던 승객과 승무원 75명을 희생시킨 죄인이 되는 겁니다.


사고 조사에는 앞으로 2년이 소요됩니다.


판단이 안 되면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냥 노래라도 부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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