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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 제이 May 31. 2022

셍튜어리(Sanctuary)




역사가 오랜 중세 유럽의 수도원 중에는 아직도 이런 sanctuary라는 문구가 남아 있는 곳들이 있다. 


종교재판을 피해 이곳에 들어가면 목숨을 보호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후의 삶은 개명을 하고 수녀나 수사로 평생을 살아야 했지만 말이다. 


이런 배경을 알기에 나는 브리핑실에서 종종 크루들에게 


"자 오늘 기장인 나는 조종실을 여러분의 성스러운 sanctuary로 선포하는 바입니다. 누구든 비행 중에 도망?이나 잠시 휴식이 필요하면 조종실로 찾아오세요."


이 말을 마치고 내 옆의 사무장을 내려다보면서 동의를 구하는 강압적 눈짓을 보낸다.  


나는 보통 브리핑에 앞서 먼저 인사를 건네느라 사무장 옆에 다가가 서 있어서 이런 각도가 나온다. 


사무장들 대부분은 고갯짓이나 눈빛으로 이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낸다. 


본래 취지와는 달리 승객이 적은 날 나의 생튜어리를 방문하는 크루들이 늘어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정작 만석에 가까운 비행에선 크루들이 비행 내내 칵핏을 찾아올 그 잠시의 짬을 내기 어렵다. 


많은 이들이 찾아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다. 


지난 비행에선 단 한 명의 크루가 맨 뒷 꼬리 쪽 겔리에서 나의 사무실을 찾았다. 이곳의 크루들 중 일이 가장 힘든 곳이다. 


지친 표정의 그녀가 들어서자 우린 우선 무엇을 해줘야 할지를 살폈다. 


기장과 어떤 상담이 필요한지, 밤하늘 별을 보고 싶었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너무 피곤해 잠시 눈을 붙이고 싶었을 수도 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나는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부기장을 바라보면서, 


"자, 우리 나이트 모드 Night Mode?"


칵핏을 밝히고 있던 스톰 라이트 Storm Light(폭풍이 치는 밤 어두운 칵핏에서 번개로부터 조종사들의 시력을 보호하기 위해 최대로 불을 밝히는 모드)를 꺼 조종실을 어둡게 만들겠다는 뜻이다. 


갑자기 어둑해진 칵핏의 뒤쪽 구석에서 그녀가 양팔을 베개 삼아 벌써 고개를 그 위에 파묻고 있다. 


"고마워요. 아주 잠시만 모든 것이 조용했으면 좋겠어요. 잠시만요. 감사합니다. 기장님. "


이제부턴 모두가 말이 없다. 


완벽한 침묵.


셍추어리를 지키는 두 수사들이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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