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태우.
알고 보니 내로라하는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에 판검사 장차관은 수두룩하고, 못해도 의사쯤은 돼야 제 앞가림한다는 소리를 듣는 집안. 그런데 진태우는 예외였다. 중상위권에 간당간당한 성적은 걱정거리가 아니라 외면거리였다. 서울의 중위권 대학에 지원했을 때 식구들은 합격 여부를 물어보지도 않았다. 식구들이 전문용어와 외국어를 섞어가며 대화하는 동안, 진태우는 세워 놓은 석상일 뿐이었다.
말을 않다 보니 생각도 없어지고, 생각이 없으니 자기의 인생에 대한 기대도 없었다. 풍족하고 지위 높은 집안에서 그의 역할은 투명인간이었다. 그는 군대라도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형들에게 하던 대로 ‘면제’시켜 주었다.
없으나 있으나 마찬가지인 존재. 그리고 며칠 뒤면 그의 스물일곱 번째 생일. 아마도 어머니의 비서로부터 형식적인 선물을 전달받게 될!...... 그렇다면 그냥 한번 미친 척이라도 해 보고 콱 죽자는 생각이 울컥 올라왔던 것이다.
그가 자살 따위를 할 인물이 아니라는 걸 대번에 알아본 구아정이 물었다.
“혹시 경력이라면......?”
“아무것도 해 본 적이 없는데요.”
“그렇담 혹시 특기라도......”
“특기요?.... 글쎄 뭐.... 벌레를 좀 잘 잡는데.......”
그는 이 말을 하며 또 날아다니는 하루살이 한 마리를 쓰윽 잡았고, 구아정은 고객에게 필요한 것이 무언지 확신을 얻은 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체성 새로고침 여행! 멋지죠. 빈틈없이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진태우는 뭔가에 홀린 듯, 적지 않은 금액을 ‘두둥실 여행클럽’의 회원가입비로 일시불 납부하고 돌아갔다.
그 무렵, 동네 입구의 버스정류장에 버스가 멈춰 섰다. 경쾌한 복장에 멋진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버스 뒷문으로 내리며 운전석의 기사에게 소리쳤다.
“형님, 말씀하신 건 제가 오늘 중에 알아볼게요. 걱정 마시고요. 좋은 하루!”
기사와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각별한 사이였을 것이다. 빙긋 웃으며 오른손을 들어 보이는 기사의 반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기사뿐 아니라 거리의 수많은 사람이 그와 각별한 사이인 듯했다. 인사를 나누고, 서로 간에 오만가지 아는 체를 하고, 수선을 떨고, 심지어 주인에게 끌려가던 강아지마저 꼬리를 치며 그에게 따라붙었다. 그는 두둥실 여행클럽의 또 다른 여행매니저 송기석. 아침 일찌감치 소집된 여행사의 회의에 늦지 않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지만, 그의 발걸음마다 아는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기석 아저씨! 오늘 우리 반 공개수업인데 아저씨도 오실래요? 종민이가 귤 까는 로봇으로 발표해요.”
“너는? 너도 등 긁는 로봇 만들고 있었잖아?”
“근데 완성을 못 해서 잘렸어요. 헤헤”
그 이후로 거의 뛰다시피 서두른 덕분에 송기석은 간신히 회의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구아정이 입을 열었다.
“우리 다 같이 ‘리플리’ 볼까? 알랭 들롱 판이 나은가? 맷 데이먼 판이 나은가?”
의뢰인 진태우의 여행에 대한 회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체성 새로고침 여행’이라면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가 도움이 되겠지. 변영주 감독이 만든 영화로 보든가.”
누군가가 거들었다.
중요한 것은 여행자에게 ‘강한 존재감’의 체험을 선사하는 일이다. 자기의 집안에서의 투명 인간이 하루아침에 돌변한 180도의 지점에는 어떤 모습이 있을까? 갑질을 일삼는 재벌 3세? 중요한 비밀을 감추고 있는 정보원? 결핍이 없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이기에 무연고, 무소유의 노숙자가 돼 보는 것이 가장 충격적 체험일지도 모른다........ 여섯 명의 여행 매니저들은 열띤 토론을 벌였고, 그 결과로 몇 개의 아이디어를 정리한 제안서가 완성되었다.
다음날 약속 시간에 고객 진태우가 찾아왔다. 전날 만들어 둔 제안서에 대해 구아정이 브리핑을 끝냈지만 진태우는 결정을 하지 못한 채 한동안을 망설였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말도 없었고, 질문이나 제안 같은 건 아예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인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이 흘러갔다.
이제는 누군가 나서서 대신 결정을 해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순간, 진태우는 뜻밖의 행동을 시작했다. 제안서의 항목을 볼펜으로 콕콕 찍어대며 입으로는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얼거리는 소리가 무언 지는 자세히 들어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어느 것을 택할까요. 알아맞혀 봅시다.....”
한 열 번의 중얼거림이 끝난 뒤 진태우의 볼펜이 멈춘 곳은 제일 마지막, 가능성이 없으리라 여기고 단지 구색 갖추기로 끼워 넣었던 선택항목, 즉 ‘골동품 대가의 수집여행’이었다. 여행사의 스태프들이 당황한 것과는 반대로 진태우의 얼굴에는 안도의 미소가 슬쩍 스쳐갔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이 여행을 선택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자기의 내심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 어색했을 뿐.
이 여행의 문제점이라면 무엇보다도 큰 액수의 현금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나 진태우는 바로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특수 분야의 전문가 행세를 하며 현금을 펑펑 질러보고 싶었다. 브리핑 중 ‘존재감을 표현하는 데 돈 만한 물건이 없다’는 부분에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었다. 어릴 때 받은 세뱃돈부터 짬짬이 모아둔 현금이 통장에 두둑이 쌓여 있었다. 이번 여행에 그 돈을 다 쓴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앞으로 살 날도 많지 않으니.......
다음 단계는 여행 매니저들 중에서 동반자를 선택하는 과정! 보통의 경우 여행자들은 매니저들의 개성과 특기 분야를 요모조모 따져가며 까다롭게 한 명을 지정하곤 했다. 선택자로서의 특권을 즐기는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태우는 또 한 번 스스로 뭔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앞에 곤혹스러울 뿐이었고 여행사는 지켜보기에 지루하고 답답할 뿐이었다. 보다 못한 구아정이 안내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보기엔 이 매니저가 적격일 것 같은데, 한번 생각해 보시겠어요?”
구아정이 가리킨 안내서에는 여행 매니저 송기석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다. .
베스트프렌드 송기석 (30세)
뭐니 뭐니 해도 친구와의 여행처럼 즐거운 게 또 있을까요?
재미있고 재주 많고 속 깊은 당신의 절친 송기석입니다. 지루하고 심심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 노래하고 춤추고 장난하고 모험하는 유쾌한 여행을 약속합니다. 그뿐인가요? 밤을 새워 이야기를 들어 주고, 당신과 함께 울고 웃는 다정함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 아주 가끔 사람들 앞에서 창피한 경우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워낙 아는 사람이 많아서 시간이 지체될 우려가 있습니다. 사람이 좋아서 그러려니,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의뢰인은 살았다는 듯, 이 추천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