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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양이 Nov 01. 2024

22. 엄마라는 사람들 (1)

  아주 오랜만에 돈이 좀 되는 의뢰가 들어왔다. 15명 규모의 ‘수험생 학부모 세미나’! 

의뢰자는 고2 자녀를 둔 엄마들의 모임이었다. 


  그 모임의 회장은 처음에 매우 의심스럽고 못마땅한 시선으로 여행사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지만 부드러운 빵 냄새로 가득 찬 실내에서 몇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마음이 꽤나 풀어졌던 모양이다. 이 여행사와 계약하는 쪽으로 점점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1년은 우리 목숨이 아니거든, 애를 위해 사는 거죠. 전투를 앞두고 서로 각오를 다지고 정보교환도 하는 세미나예요,”

  “그럼 특별히 원하시는 프로그램이라도......?”

  “진학상담사는 우리가 섭외해서 갈 거예요. 강남에서 특 A급인데 애 아빠 인맥을 총동원해서 겨우 시간을 얻어냈어요.”

  회장은 은근히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는 스타일이었다.


  “네, 편안하고 유익한 세미나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시기에 우리가 1박 2일 자리를 비운다는 게 보통 결심이 아니거든요. 아이한테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되는 시기라고요. 그런 줄 아시고 이 시간이 헛되지 않게 잘 준비해 주세요.”    

  부탁인지 명령인지. 회장은 꽤 깐깐하게 굴었다. 아마도 입시생을 둔 엄마의 긴장감이려니 생각되었다.  

    

  그런데 한 시간 뒤에 같은 모임에서 또 다른 엄마가 찾아왔다. 회장이 선택한 여행사가 어떤 곳인지, 어떤 주문을 하고 갔는지 확인을 좀 해야겠다면서. 

  먼저 왔던 회장보다 체구가 더 크고 목소리 톤이 높았다. 보아하니 두 엄마 사이에 상당한  갈등이 있는 듯했다. 그 여인은 회장이 주문한 것 중에 빠진 게 많다고 툴툴대던 끝에 보안유지와 환불규정 조항을 추가하고 돌아갔다.          


  불똥이 떨어진 듯 분주했다. 일주일간 모든 크루들이 밤을 새우다시피 일했다. 참가자 15명을 일일이 접촉해서 요구사항을 들어야 했고, 장소 답사, 프로그램 준비, 강사 섭외, 출장 식당 계약, 자료집 제작, 기구 설치... 

  얼마나 피곤했던지 구아정이 실수로 빵을 새까맣게 태우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두둥실 여행클럽 창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창문을 열어 냄새를 빼고 오븐을 닦고 수선을 떠는 중에 외출을 나갔던 송기석이 회사로 돌아왔다.


  평소의 쾌활함은 어디로 간 것인지, 기석은 영혼을 빼버린 채 껍데기만 남은 사람 같은 모습으로 주저앉아 새까맣게 탄 빵을 집어먹었다.  

  “어어! 그거 먹는 거 아니야!”

  뒤늦게 기석을 발견한 구아정이 소리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기석은 또 다른 빵을 집어서 입 안에 욱여넣는 중이었다.

  한시욱이 기석의 옆에 와서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구아정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기석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혹시 또?"

  송기석은 마른 얼굴을 손으로 벅벅 문질러대더니 입을 열었다.

  "일주일 만에 집에 들어왔는데... 서류까지 가져왔더라고. 도장 찍어서."


  멀리서 오븐을 닦고 있던 나창수가 툭 끼어들었다.

  "야, 넌 이미 반년 전에 이혼을 당했어야 맞는 거야. 저번에 계수 씨 생일날, 기껏 비싼 케이크 사 들고 가다가 그거 놀이터에서 동네 애들 반 잘라 주고 반쪽짜리 들고 들어갔다며?" 

  "나라고 그러고 싶었겠어요? 애들이랑 아주 간단한 내기를 했는데, 지는 바람에... 아, 어떡하지? 이번에는 진짜 심각해요."

  송기석은 고개를 숙이며 푹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지금은 송기석의 사정을 듣고 있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모든 걱정과 근심, 공감과 위로, 그 모든 것은 행사 이후로 미루어야만 했다.  


참가자들의 이름표를 제작했는데, 그들은 “OO맘”이라는 호칭을 선택했다. “OO엄마”도 아니고 “OO맘”이라니....... 아무튼 그게 그 그룹의 문화인 듯했다. 회장은 “재호 맘”, 나중에 찾아온 엄마는 “민수 맘”이었다. 

  참가자들은  모두 성적상위권의 자녀를 둔 엄마로서 자존심이 대단했고 같은 그룹의 엄마들끼리는 경쟁해야 할 적이자 정보를 나누어야 할 동지로 미묘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칙은 간단했다. 정보를 주는 사람은 ‘동지’, 정보를 숨기거나 가로채는 사람은 ‘적’, 그 외의 판단기준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들은 “애를 위해서라면”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15명의 수험생 엄마들이 모인 공간은 마치 무림의 고수들이 모인 듯 기운이 팽팽해서 말 한마디 꺼내기가 무서웠다. 하지만 비장하고도 매서운 눈을 하고 있던 엄마들이 개인으로 돌아오면 꼭 딴 사람 같았다. 그들은 예의 바르고 솔직했으며 대부분 좀 지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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