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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양이 Nov 13. 2024

27. 어디라도 가고 싶어요. (1)

제1권   마지막 이야기

  늦은 밤, 두둥실 여행클럽의 회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집이 경매로 넘어간다. 그렇다면 회사는? 우리는?.......

  뜻밖에도 제일 담담한 사람은 구아정이었다.     

  “흠....... 우리 해산 기념으로 여행이나 갈까? 사실 여기 우리한테 너무 익숙해. 우리 삶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니잖아.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으로, 낯선 삶을 세팅할 때가 됐나 보지 뭐.”     

  그 말에 안수호는 구아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속으로는 이렇게 묻고 있었다.

  ‘B.J는? B.J는 어떡할 거니? 네 인생을 낯선 것으로 세팅한다면 말이야.’     


  “전 이제 막 새 삶을 세팅했는데....” 

  진태우가 세상을 잃은 듯이 말했다.

  “넌 어차피 인턴이잖아. 인턴은 아무 때나 짤리는 거고, 아직 세팅도 안 된 거라고.”

  나창수가 늘 하던 대로 면박을 줬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송기석은 은행 다니는 친구를 만나 사정을 해 봐야겠다며 사무실을 떠났다.   

  

  밤이 점점 깊어 가는데 조용히 초인종이 울렸다. 울리는 듯 마는 듯 희미한 초인종 소리였다.

 ‘이 깊은 밤에 누구?’ 

  문밖에는 지친 얼굴의 여인이 서 있었다. 어린애를 둘러업고, 그리고 또 한 아이의 손을 잡은 채. 

  회의는 중단됐고 피곤한 얼굴의 여인이 자리에 앉았다. 구아정이 자기 자신을 위해 비상약처럼 아껴두었던 푸딩을, 망설이던 끝에 꺼내왔다. 어린애가 요란하게 울었다.


  “생각해 보면 모두 저 때문이지 싶기도 해요. 그때 교회 오빠에게 제가 너무 심하게 대해 가지고... 그러다가 다른 남자를 만났고, 덜컥 순결을 잃었고. 이게 운명인가 보다, 첫 아이를 낳은 뒤 정말 이렇게는 못 살 것 같아서 모든 걸 끝내려고 했는데 그날이 하필이면 시어머님이 생신이라, 손님들이 오셔서, 그래서 못 나오고....”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었다. 아이 엄마가 30분 정도 이어가고 있는 사연은 한 마디로 ‘답답’했다. 결단성 없고, 미련 많고, 그러다 보니 이리 치이고 저리 눌리고, 이 사람한테 속고, 저 사람한테 이용당하고, 그러면서 지난 일을 잊지도 못한 채 자기를 들들 볶으며 사는 그런 여자였다. 

  이야기가 잠시 중단됐을 때 구아정이 물었다.

  “그래서 어떤 여행을 하고 싶으세요?”

  “그냥 어디라도 보내주세요. 더 이상은 1분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아니 견딜 수 없어서 뛰쳐나왔어요. 떠나고 싶어서. 그런데 여기 불이 켜있었고, 가까이 와 보니 여행사였어요.”

  “여행전문가로서 말씀을 드리자면, 여행이 시작되는 건 ‘여행 준비’부터랍니다. 그런데 아직 아무런 준비가 안 되신 것 같아요. 아직 떠날 단계가 아니라는.......”      

  구아정의 말을 자르며 나창수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니, 그럴 때는 그냥 보석 같은 거만 챙겨서 앞 뒤 안 가리고 뛰쳐나오는 거예요. 애를 둘이나 달고 데리고 나오면 그게 마실이지 가출이에요?”

  “그럼 어떡해요? 작은 애는 아직 젖을 먹고, 큰 애는 어린이집을 혼자 못 가는 걸.”

  이런 상황에서 가장 가장 현실적인 사람은 늘 한시욱이다.

  “저희는 여행사고, 회비를 받아요. 돈은 좀 가지고 있으세요?”

  여자는 쭈뼛거리더니 떨리는 손으로 손가락에서 반지를 뺐다. 꽤 큰 다이아가 반짝거렸다.

  “결혼반지예요. 이걸로 지불할 수 있을까요?”

  보석감정사 자격증이 있는 안수호가 반지를 받아 잠깐 들여다보더니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돈이 뭐... 별로 되겠는데요...... 아, 그 링, 백금은 진짜예요.”


  잠시 침묵. 그리고 나창수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떠나야겠네. 준비고 뭐고, 열받을 땐 무조건 떠나야 돼.”

     

  여인은 그 길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기차 여행이 소원이었던 여인은 가장 가까운 역에서 아무 기차라도 타고 아무 데라도 가겠다고 했다. 영유아 보육교사 자격증이 있는 안수호가 젖먹이 어린애를 돌볼 겸 동행이 되기로 했고 큰애는 여행사에서 맡아 봐 주기로 했다.


  여인과 안수호가 떠난 깊은 밤, 이제 정말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비장함으로  남은 사람들이 또다시 회의 테이블에 모여 앉았을 때, 그 깊은 밤에 또다시 손님이 초인종이 울리고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어디선가 본 듯한 30대의 여인이었다. 

  더 이상 빵이 없었다. 테이블에 커피잔만 달랑 내려놓자니 구아정의 마음이 너무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여인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이렇게 말했다.  

   

 “시간여행도 되나요?”


 그 순간 모두의 눈이 마주쳤다.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언젠가는 그런 의뢰가 들어올지도 몰라."

 상상은 해 보았지만 그때를 위한 준비는 전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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