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애쓰지 말고 힘 빼기
우리집 감나무
우리 집 감나무 이야기다. 지금 사는 집에 거주할 때 작은 막대기만큼 연약한 감나무 묘목을 심었다. 옆에 덧대주는 보조대만큼 얇고 가느다란 녀석이었다.
조금씩 잎사귀를 내더니 얇고 가느다라지만 키도 크고 점점 성장을 하는 것이 눈에 보여 기뻤다. 그러다 추운 겨울이 오고 잎사귀가 다 떨어지고,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고 길었던 독일의 겨울 동안 마치 죽은 듯 앙상하게 여윈 모습으로 한참을 그렇게 보냈다.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고 이듬해 따뜻한 봄이 오자 "나 아직 살아있어요"라고 말하듯 봄눈을 틔워내고 작년보다 더 많이, 높이 자라 어느덧 이제는 제법 굵은 나무 기둥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한 5년 정도 자라면 어느새 탐스러운 감도 주렁주렁 열리는 때가 올 테지.
나의 독일 생활의 소확행, 여러 식물들 키우기를 하고 있노라면 식물들의 성장 과정이 마치 나의 성장, 나의 아이들의 성장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남다르게 느껴질 때가 많다. 어린 새싹, 묘목이 시기에는 햇빛이 너무 강렬해도, 바람이 너무 거세어도, 일교차가 너무 많이 나도, 물이 너무 많거나 적어도 금방 죽어버릴 만큼 연약하다. 그때는 농부의 세심한 관리와 꾸준한 보살핌이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다. 처음 해외 이민을 왔을 때 나는 아마 이런 새싹 같았을 거다. 다만 나를 지켜줄 농부가 없기에 스스로를 지켜내려 애쓰는 모습이지 않았을까. 지금은 조금 더 나무 기둥이 굵어져서 웬만한 바람과 추위는 버텨내는 것 같다. 나의 아이들도 딱 지금 이 과정에 있지 않을까 싶다.
다행히 햇빛이 적당히 잘 들고, 냉해와 고온 피해가 없는 좋은 토양에 싹을 틔운 것에 1차로 감사하고, (국가) 허허벌판에서 이제는 거센 바람 정도는 막아줄 울타리가 있는 정원에 자리잡음에 2차로 감사하고, (가정) 벼락 지진 태풍 홍수 가뭄 병충해 등의 천재지변을 마주하지 않기를 희망하며 (행운) 이제는 너무 쥐어짜면서까지 애쓰며 살지 말고, 힘든 일이 좀 생겨도 “오히려 좋아” 마인드로 내 삶에 집중해 보자고 스스로를 다독거려 본다.
눈은 결국 녹고 꽃도 결국 지고
사랑도 결국 식을 것을
오늘 나는 인생 전부를 걸고 있구나
요즘 핫하디 핫한 SBS Plus 예능 프로그램 <나는 솔로>를 보다가 문득 이 문구가 마음에 꽂혔다. 무슨 허무주의 논리인가 싶겠지만, 성향도 살아온 배경도 모두 각기 다른 남녀들이 한데 모여 오로지 '사랑'이라는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며칠 살다 보니 불나방처럼 다들 이성을 잃고 그 순간에 몰입을 하여 마치 인생 전부를 거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꿈같은 그 시간이 지나 현실 세계로 돌아오면 콩깍지인지 마법인지가 풀리고, 누군가는 원하던 짝을 찾기도, 누군가는 후폭풍을 감당해내기도 하는 것 같다.
짝짓는 남녀가 저 죽는 줄 모르고 불나방처럼 달려들듯, 아이에 대한 모성애 역시 참 강렬하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세상 작고 소중한 분신 같은 아이가 눈앞에 있으면 세상 엄마들은 다들 초인이 되는 것 같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고. 병뚜껑 하나 못 따던 여자는 어느새 양손에 아이 둘도 거뜬히 안고 다니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못하던 새가슴도 내 아이 일에는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잠꾸러기 아가씨도 모유수유로 밤새 잠 못 이루는 초인적인 힘도 발휘하고, 주사 맞는 것도 질색하던 소녀는 아픈 아이를 밤새 간호하며 자신이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계란 프라이는커녕 계란 껍데기 깨는 것만 수 십 분이 걸리던 요리 초보는 어느새 주방을 진두지휘하며 아이의 먹거리를 챙긴다.
해외 나와 살아보니 이건 또 다른 신세계라.. 도장 깨기를 해도 해도 산 넘어 산. 신생아 겨우 사람 만들어놨나 싶었는데, 다시 내가 신생아가 된 기분이랄까. 내 나라 고국에서는 비빌언덕도 있고, 육아하다가 어려우면 도움받을 가족, 지인, 하다못해 부모 교육이나 책도 구하기 쉬운데, 기본적으로 언어 패치가 다른 타국살이에서 맨 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늘 긴장하고, 애쓰고, 참 무던히도 마음 졸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왔던 것 같다. 그렇다고 육아를 잘 해낸 것도 아니고, 엄청 대단한 것을 한 것도 아닌데 같은 일도 타국에서는 긴장감, 위기감, 타격감, 불안함 등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 혈혈단신, 완전무장, 각자도생, 고군분투의 현장.
해외살이 초반에는 초인적인 힘으로 시간을 쪼개어 언어를 배우고, 집을 알아보고, 아이들 학교에 봉사활동을 다니고, 플레이데이트를 해주며 새벽마다 김밥 도시락을 정성스럽게 싸서 보냈다. 어학 자격증을 따고, 영주권을 따고, 집을 사서 이사를 하고, 투자를 하고, 국제학교에서 독일학교로 옮기며 내가 공부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각종 캠프와 방과 후 활동을 다양하게 알아보고 시도하고, 아이들 적성 찾기와 성향을 파악하려고 무던히 애쓰던 나날들. 엄마 아빠가 무너지면 여기서 아이들이 설 곳이 없다는 마음으로 쫓기듯 버텨온 것 같다.
너무 애쓰지 말고
힘 빼자
이제는 좀 살만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 나이가 되었고,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법을 배워야 할 시기가 되어서일까? 아니면 나도 나이가 들면서 에너지가 좀 빠져서일까? 무거운 갑옷을 좀 내려놓고, 꼭 완벽하고 멋진 이상적인 엄마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물 흐르는 듯, 아이들에게 좀 맡겨보고, 내려놓음의 육아를 해보자는 마음이 스멀스멀 든다. 내가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렇게 해줘서도 안되고, 해줄 수도 없는 현실이 오히려 다행이고, 좋다. 힘이 잔뜩 들어간 내가 힘을 뺀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를 다짐하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글로 적어본다. 육아는 내려놓음의 과정이라는 것 잊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