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 참 잘했다
눈을 떠보니, 나는 호찌민의 아침에 있었다.
이미 만발의 준비를 한 올케와 조카와 잠깐이지만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떠나는 출국길에 배웅을 해준다. 나는 여름에 왔는데, 그들은 겨울로 간다. 안녕, 계절 크로스!
집주인들은 다 나가버린 남의 빈집의 베란다에 가서 쭉 한번 둘러본다.
여행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이다. 밤비행기를 타고 와서 자고 일어나 커튼을 열고 맞이하는 낯선 뷰, 냄새도 온도도 다른 공기, 다른 높이에서 보게 되는 시야.
덥지만 뜨거운 커피 한잔을 내려마시며, 세포 곳곳을 각성시키며 이 상황의 리얼리티를 내 시야로 로딩시켰다.
당장 내일부터 출근한 남동생 없이, 나 혼자서 애들 첫 등교와 일상을 시작해야 하므로 오늘은 동네 지리 파악 + 생필품구매 등으로 목표를 잡기로 한다.
가족들을 공항에 배웅하고 골프 가기 전 딱 1시간 정도 짬이 난 남동생이 나서서 동네 투어를 시켜주었다. 일단 아파트에 있는 인피니트 풀이 있는데, 집에서 3층만 내려가면 바로였다.
그냥 집에서 수영복 입고 나와서, 수건 둘러매고 들어와서 샤워하면 되는 이 동선에, 아이들이 신난다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사는 아파트이다 보니, 1층에는 대부분 한국식 상가였다. 여기서 한 달 동안 어디 안 나가도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만큼 설렁탕집부터 한국마트, 한국 미용실, 게다가 한 달 동안 못 먹을 줄 알았던 떡볶이집이.. 1층에.. 있네?? 남동생이 왜 인천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떡볶이를 먹고 왔냐며 비웃었다.(말을 해주지..)
그리고 아파트 바로 건너편 쌀국숫집, 카페, 로컬마트, 과일가게, 마사지 샵등을 알려주었다. 푸릇푸릇한 나무조경들과 반팔을 입고 돌아다니는 이 개운함도 좋은데, 동네 구석구석 재밌어 보이는 곳이 많아서 마구 흥분되기 시작했다. 도장 깨기 하듯 하나씩 다 가보리라!
동생이 데려가준 식당에서 다 같이 아침메뉴로 반미를 먹었다. 예전에도 먹어봤던 것 같은데 아, 반미.. 반함.. 크랙이 사각사각 부서지는 바케트의 겉바속촉도 너무 황홀하지만, 안에 넣은 고기며 고수는 왜 또 이리 조화로운지.. 아, 나는 이곳에서 분명 살이 엄청 쪄서가겠구나.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막을 수도 참을 수도 없는 이 맛의 향연을 누리다 가겠노라. 결심했다.
아이들은 코코넛한통 씩 먹으며 눈이 똥그래졌다. "엄마 진짜 맛있어!!!" 아이들도 이미 이곳이 좋아지고 있는 모양이다.
대강만 설명하고 가라고, 남동생을 서둘러 보냈다. 설명하는 건 너의 의무일지 몰라도 구석구석 탐방하는 건 나의 유희이니 나를 방해하지 말고 떠나거라.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와이파이 없이 연락도 잘 안 되는 휴대폰이지만, 딱히 걱정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 싶은 건지도 모르겠고.
본격적으로 아이들과 동네 탐방에 나섰다. 일단 그들의 흥분에 부응해 주기 위해 편의점을 가서 각자 음료수를 하나씩 사주었다. 역시 남의 나라에서 젤 재밌는 건 편의점 아니겠는가.
그다음 마사지가 받고 싶다고 하신다. 베트남은 마사지가 싸다고 아빠가 가서 많이 받고 오랬다나, 어젯밤 비행이 힘들었다나..
3년 전에 마지막 외국여행을 갈 때만 해도, 그냥 맨날 편의점만 가자던 녀석들이었는데 마사지를 받으러 가자고 하니 하찮으면서도 뿌듯하다. 이제 진짜 같이 여행온 친구들 같다.
나름은 그래도 비싼 곳이라, 1인당 19000원을 정도쯤을 내고 마사지를 받았다. 용인 집 앞 마사지샵에서는 5만 원인데..
이나라는 천국일까? 아까 반미도 3천 원이었고, 코코넛도 1500원이었다. 서울에서 내가 지하철을 편도로 타도 2950원이고, 김밥 한 줄도 4500원인데.. 여러 비교를 해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애들도 나도 코를 드릉드릉 골며 잠이 들었다.
개운케 마사지를 받고 나와서 과일가게를 과일을 우리가 들 수 있는 만큼 왕창 샀다. 정말이지 계속 헛웃음이 나는 가격이었다. 망고 4개랑 수박 한 통을 샀는데 만원을 안 썼다. 우라들..망고 너무 좋아하는데, 비싸서 자주 못 사줬던 내 한을 반드시 여기서 풀고 가리라. '엄마가 망고는 무한리필로 사주겠다 '맘먹어본다.
에너지가 충전된 아이들이 이제 수영장을 가자고 한다. 그래 내 분명 그럴 줄 알았다. 어찌 그 수영장을 보고, 그냥 넘어가겠니. 후다닥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타월 2개만 달랑 챙겨 달려간다 수영장으로.
호텔 수영장에 가는듯한 이 기분, 수영장이 공짜인 이 뿌듯함. 반나절만에 호찌민이 너무 좋아져 버렸다. 아이들이 신나 하는 얼굴에 내가 더 신난다. 그래 이거 하려고 왔지, 맘껏 신나라, 맘껏 놀아라!!
사실 이 모든 걸 염두에 두고, 아까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 2캔과 베트남식 새우깡을 내려놓고 썬베드에 눕는다. 아아, 천국이 따로 없구나- 애들 웃는 소리, 물 튀기는 소리, 경쾌한 사운드가 좋아 가지고 온 에어팟도 끼지 않고 멍하니 흐르는 땀을 만끽하며, 그러나 시원한 맥주를 만끽해본다.
'난 휴양은 생각도 안 하고 왔는데, 여기 지금 내가 휴양을 하고 있네.'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등교하루전날 와서 적응 못할까 봐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단 반나절만에 반미 먹고, 과일사고, 마사지받고 수영까지 하고 있으니까. 벌써 신짜오(안녕하세요)와 깜언(고맙습니다)이 입에 붙은 아이들과 보낼 이 한 달이 수월할 것 같단 생각에 안도가 든다.
남동생에게 카톡을 한다.
"천천히 와도 돼, 애들 이미 적응하고 수영장까지 와서 뽕뽑는중"
남편과 가족들에게도 아이들 수영사진을 보내며 무사안착을 전한다.
여기 오기까지 아빠대로, 할머니할아버지대로, 삼촌대로 각자의 걱정과 노파심들이 있었는데 신나 하는 아이들 표정과 내가 전하는 현지소식에 다들 안심이 된 듯하다. 한참 동안 가족방에 시끌시끌 재밌는 대화들이 오간다.
애들아, 알아주렴.
그저 너희가 잘 지내는 것만으로도, 사는 즐거움이 되는 어른들이 많단다.
그러니 우리 잘 지내고, 잘 지내다가 가자?
수영이 질릴때즘되니, 아이들이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고 한다. 새로운 학교와 친구들 만나러 가는 게 너무 기대되고 흥분된다면서..
이렇게 매일매일 기대되는 내일이 있는 건 참 즐거운 일이야, 그렇지?
애들아,
우리 오길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