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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g Feb 07. 2023

[호찌민 한 달 살기]두번째 여름의 시작

여러분~~너무 보고싶었써여~~~

그렇다고 어찌 푹 잘 수 있겠는가,


특유의 건조함, 앞자리 귀여운 꼬마 녀석의 까꿍놀이, 내 앞에 유소년축구 단체팀덕에 그리고 어쨌든 약간의 긴장감덕에 2시간의 시간경계선을 넘는 5시간의 비행은, 그저 묵언수행 같은 기분이었다.

되려 아이들이 푹 자주어 다행이었다. 도착하면 1시, 한국시간 3시. 밤비행기는 참 별로다.


도착했다. 비행기 문을 열고 나선 첫걸음에 느껴지는 온기. 아니 열기, 훈훈함. 좀 전에 눈 쌓인 활주로를 떠나왔는데 말이야, 덥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낯선 활자, 낯선 언어. 반팔의 공항직원들.

3년 만에 느껴보는 이 즐거운 이질감에 아이들도 살짝 흥이 오른듯하다. "엄마, 기분이 이상해. 안 추워 ㅎㅎ"

자 이제 만끽해 보도록 하자 애들아, 이 모든 낯섦을.


다행히 입국심사 줄은 길지가 않았다. 항상 외국 입국수속할때 나름의 재미는 입국심사자들 중에 제일 인상좋은 사람쪽에 가서 줄을 서는건데 ( 그래야 현지어로 웃으며 인사도 한마디 하니까) 이번엔 잘못 줄을 서서 세상 심각한 표정의 직원에게 걸렸다.언제 써먹나 기다리던 비자페이퍼를 요청하길래 아싸, 하면서 꺼내주는 내 표정과 바라보던 님의 표정은 상반되었지만, 어쩔티비. 저는 신나요!




가장 우려했던 간장게장은 허무하게도 너무나 무사히 수화물 벨트에서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히려 내 게장은 귀여울 지경이었다. 어찌나 큼직큼직한 스티로폼박스들이 줄줄이 나오는지. 그래 이제 남동생입으로만 잘 넣어주면, 된다.


준비해 온 공기계에 내 유심을 넣고, 미리 사둔 베트남유심을 내 핸드폰에 넣었는데 도착해도 유심이 안된다.

망할.... 이 새벽에, 이 주말에 안되면 이건 뭐 어디다가 물어봐야 하나... 급한 마음에 새로 하나 살까 하다가 다행히 공항 와이파이를 연결해 간신히 동생에게 카톡을 보냈다. '도착'

비행기가 계속 지연되기를 반복했다가 막상 도착은 빨리하는 바람에 동생은 미리 나와있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공항밖으로 나와 쌀국숫집 앞에 앉아 낯선 택시색깔들, 웅성웅성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이 언어들, 긴팔을 입기엔 답답한 이 날씨에 조금 적응해 보기로 한다.


멀리서 “누나! ”하고 덩치 큰 녀석이 부른다.. 거의 2년 만인가.. 남매는 원래 살갑지 않다. “야 왜 이제와! ”하고 빈소리를 날리고 ”삼촌~~ “하고 안기는 녀석들에게 친근한 재회는 미뤄본다. 이렇게 큰 사람은 오랜만이지 애들아?ㅋㅋ

동생이 타고 온 택시에 올라타며 마스크를 써야 되냐고 물어보니, 여기는 아무 규제가 없단다. 실내,실외- 마스크 의무가 아니란다.!! 올레~~~

당장 내 턱에 걸친 마스크와 아이들 마스크를 걷어 구겨 넣었다. 진짜 한 달간 마스크 없이 사는 거 자체만으로도 이미 잘 왔다 싶다.


동생은 배가 고프냐고 물었다. '출출하면 쌀국수나 하나 먹고 들어갈래?' 사실 한국시간 새벽 3시 반에 내가 지금 배가 고프겠냐만은, 집으로 가기는 좀 아쉬웠다. 늦은 시간 이긴 하지만 베트남에 온 걸 실감하고 싶긴 했다.

쌀국수 귀신인 우리 딸은 "쌀국수!!!! 좋아!!" 하며 외치니, 동생이 기사아저씨와 꽁냥꽁냥 대화를 나눈다.

급 기분좋아진 아저씨가 엄지척을 하더니 쌀국수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새벽 1시 반, 도착하자마자 쌀국수로 한달살이 첫 일정 포문을 열었다.


쌀국수집에 자리 잡고 앉아 둘러본다.

쌀국숫집 옆으로 화려한 술집골목, 윙윙거리며 지나다니는 오토바이들, 길거리 음식들. 그리고 쌀국숫집의 작은 플라스틱의자와 돈 주고 사는 물티슈, 쌀국수와 같이 나오는 여러 향신채. 가득 쌓아진 라임. 물값과 똑같은 맥주.

히히, 나 왔구나 베트남..


동생이 그래도 첫날이라 물갈이를 할 수 도 있다며, 맥주와 같이 나온 얼음잔에는 따라 마시지 말라고 한다.

내 어디 가서, 물갈이하고 그런 초짜 위장은 아니다면 이번만큼은 우리 가족 아프지 말고 가는 게 내 제일 큰 목표이니 시키는 대로 쌀국수만 먹었다.


동생이 시키는 대로 마늘 두 조각, 고추 2개, 향신채를 가득 꺾어 넣어서 때려 넣어 동남아 특유의 스푼 한가득 국물을 뜨고, 면발을 얹어 후루루룩 미끄러지듯 흡입한다.


크흐, 입안에서 온갖 육수의 감칠맛과 향신채 특유의 개운함. 미끄덩 거리며 회오리를 타는 면발이 뒤섞여 내 미각이 온 대륙을 휙 훑고 지나간 기분이다. 미간이 찌푸려지도록 감탄사가 나온다. 크흐, 이거지 이게 진짜 쌀국수지.

숨도 안 참고 바로 맥주 한 캔을 콸콸콸 털어 넣는다. 맥주로썬 밍밍하니 별로인 베트남 맥주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갈증을 채우기에 더할 나위 없는 생명수 되시겠다.


미쳤지.. 이 시간에.. 하며 결국 쌀국수 한 그릇을 원샷 때리고, 기다려준 택시를 다시 타고 드디어 집으로 간다.

남동생은 또 4시간 후에 새벽에 출국하는 올케와 조카를 배웅하러 공항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회사사람들과 골프를 가야 한다고 한다. 내가 그래서 알아서 택시 타고 가겠다고 했었는데, 녀석이 괜찮다며 데릴러와줘서 괜스레 미안하면서도 든든했다. 간장게장 때문은 아니겠지?ㅋㅋ


도착한 동생네 아파트가 생각보다 럭셔리하다. 오던 길에서 보던 베트남과는 사뭇 다른 바이브다. 인스타 사진에서는 여러 번 봤지만, 실제로는 더 좋아 보인다. 니가 이런곳에 살고있었다는것도 마음이 놓이고, 우리가 이런곳에 지낼거라는것도 마음이 놓이는 순간이었다.


"쉿 쉿!!!" 자는 올케와 조카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들어가 오랜만에 보는 여름 잠옷으로 대충 갈아입었다. 샤워가 마렵긴 했지만, 몇 시간만 참았다가 이따 올케 일어나면 개운하게 하기로 했다. 일단 동생도 조금이라도 재워야 하고, 조카도 이 시간에 깨면 완전 민폐이다.


동생이 잘 자라며, 에어컨을 켜주는데. 헛 웃음이 나온다. 에어컨을 켜고 자는 밤이라니. 아깐 분명히 보일러를 켜고 있었는데 말이야..


우리셋, 가벼운 흥분감을 억누르며 내일아침엔 마사지도 받고, 망고도 사 먹고 그러자고 조곤조곤 결의(?)하며 아침인지 새벽인지 모를 이 시간에 일단 눈을 붙여본다.


다행히, 감사히, 일단 잘 도착했고, 이렇게 우리의 2022년 두 번째 여름을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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