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g Feb 06. 2023

[호찌민 한 달 살기] 출국

기어코 떠나버린 사람

출국은 오후 8시였으므로, 하루가 넉넉했다.

짐이야 이미 싸놓았지만, 캐리어 2개 중 하나가 거의 절반이 비었기 때문에 나는 괜스레 뭐 빠진 게 없나.. 거실을 로봇청소기처럼 오가며 이것저것을 계속 체크하고 집어넣고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J화 되어버린 나는, 한 달 전에 머릿속으로 준비리스트를 완료했고 야무지게 다 잘 챙겼는데 괜히 비어있는 캐리어 반칸이 아쉬웠다. 촌스럽게 가득가득 채우지 말고 적게 가져가고, 되도록 생필품은 가서 사서 쓰고, 없는 대로 살아보자 마음먹었음에도 말이다.


사실 캐리어 무게를 줄이려고 노력했던 건, 남동생이 꼭 먹고 싶다던 "간장게장" 때문이었다.

매일매일 한식만 먹고 산다는 녀석도 간장게장만큼은 구할 수가 없다며, 내게 간장게장 2통만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같은 여수바다사람으로서 얼마나 먹고 싶을지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바는 아니었지만, 이게 대체 가져가도 되는 것인가... 싶어서 몇 날을 고민했다. 동생말로는 사람들 다 들고 온다고 하지만, 날것+액체류 것도 파손 시 비극이 벌어질 이 7 kg의 위험물 같은 것을 들고 가다 보안검색에 걸렸을 때, 새벽에 아이 둘을 데리고 영어로 간장게장을 설명해야 할 내 모습은 내가 원하는 한달살이의 첫 장면은 아니었다.
타국에서 고생하는 동생의 유일한 요청사항을 거절하고 나의 거룩한 비행을 방해받지 않을지, 마음까지 간장처럼 졸여질 간장게장을 어떻게든 들고 가서 사랑하는 동생까지 안전하게 착륙시킬지 오래도록 고민했지만,

우짜겠니. 얼마나 먹고 싶겠니. 정 안되면 가서 버리지 뭐 하는 심정으로 나는 그렇게 간장게장 수송대작전을 결심했다.

덕분에 출국날 아침은 간장게장을 포장하느라 시간을 다 썼다. 그렇게 부탁했것만 여수에서 막 건너온 게장 스티로폼박스가 모서리는 부서졌고, 게장은 이미 약간 새서 간장대환장 그 잡채..

도착해서 우아하게 첫날을 보내려면, 나는 이 게장포장을 완벽하게 구현해내야 했다. 완벽하게 핏을 맞출 스티로폼 박스를 구하러 아침에 아파트에 있는 눈 쌓인 재활용수거함을 3번이나 돌아 겨우 구했고, 게장은 기포하나 조차 못 나가게 글라스 랩으로 앞옆위아래 미라를 만들어 버렸다. 동생아, 내가 내 짐보다 게장을 더 꼼꼼히 챙겼음을 부디 알아다오.



그렇게 캐리어 2개, 소중한 간장게장 스티로폼 박스 1개를 챙겨 일찌감치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에는 차가 어찌나 많던지, 3번을 돌고서야 겨우 주차를 할 수 있었다. 요즘 인스타에 다들 외국 가는 사진이 올라오던데, 정말 다시 예전 인천공항처럼 활기를 띄는 게 내심 고맙고, 감사했다.

이제 한 달간은 필요 없을 무겁고 큰 패딩은 모두 트렁크에 잘 접어 넣어두었다.

슬리퍼와 반바지차림으로 주차장에서 급히 차를 찾는 사람들이 보인다. 주차장에서만 봐도 보인다. 어느 계절로 여행을 가는 사람인지, 어느 계절에서 돌아온 사람인지.


이제 여름나라로 갈 우리는 카디건 하나씩만 걸치고 공항으로 들어섰다.


촌스럽지만 온갖 서류(항공권, 영문 가족관계증명서,  e-visa)를 다 프린트해 왔던 덕에 모든 수속은 수월했다. 간장게장은 포장 잘하셨죠? 묻는 직원에 말에 잠시 가슴이 콩닥였지만, 이제 나도 모르겠다. 내손을 떠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기지만(왜 웃겼는지는 다음 편에 설명) 앞으로 한 달간 못 먹을 거라며 떡볶이를 저녁메뉴로 정한 아들 녀석 때문에 떡볶이와 라면으로 올해 마지막 가족식사를 하였다. 공항이 더워 필요 없을 거 같다며 겉옷도 가져가겠다고 다 챙긴 남편을 보니 시큼시큼 마음이 찔리지만, 15년 차 부부인 나. 이런 일에 울지 않는다. 실시.


 브이를 해가며 포즈를 취하고 평소에 사진 절대 안 찍는 남편이 서보라며, 출국수속장 앞에 세운다. 신난 애들은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브이를 남발한다. 애들 데리고 많이 떠났지만, 남편을 두고 이렇게 오래, 이렇게 멀리 떠나는 건 처음이었다. 인천공항에서의 이별씬은 처음인 장면이라 어쩐지 마음이 계속 울렁거린다.


"잘 지내고 있어! 내년에 보자!" 잠깐 마스크를 내리고 뽀뽀도 한번 하고 그렇게 출국장으로 들어섰다. 가끔은 이렇게 떨어지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보고 싶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야.


3년 전 면세점에서 산 향수를 다 써서 기분도 낼 겸 면세점에서 향수를 하나 샀다. 사람마다 여행을 회기하는 기제는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향수가 그것이었다.여행 갈 때 향수를 사서 그 향을 뿌리고 다니면, 돌아와서도 향을 맡을 때마다 그 여행기억이 순간순간 코끝에 스치는듯한 기분이 들어서 좋다. 향수를 사고 나니 이제 진짜, 여행을 시작하는게이트에 들어서는 것 같다.


보딩을 기다리며 인스타를 켰는데 인스타 잘 안 하는 남편이 첫 피드에 올라왔다. 한 4달만에 올리는건가?어라? 아까 우리를 찍은 사진이길래, 당연지사 적적하다니 뭐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글을 보고 아차 싶었다.


'섭섭한데 자꾸 입꼬리가 왜 올라가지?ㅋ"


마스크에 가려져 미처 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 그가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좋아하는 위스키를 살 생각에 신나 하고 있었다는 걸.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는 걸.에라이.


그치만 실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이 한 달이 그에게도 어떤 설렘과 기대가 있을 거라면 나 역시도 떠나는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니까. 내가 남편을 남기고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애들을 데리고 떠나는 거라고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Cabin crew door side stand by. Safety check"


이제 진짜 겨울나라의 모든 문을 닫고, 떠난다. 비행에 도사가 된 아이들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5시간 비행을 고려해서 다운 받은 넷플릭스를 켜고 이어폰을 낀다.


마음이 뭔가 웅장해지려는 것 같은게 이러다 시라도 한편 쓸 것 같아 맥주 한 캔을 시키고 책을 펼쳤다.

책도 잘 안읽혀 문득문득 창밖을 보니 그간의 묘한 긴장감이 스스륵 풀리며 감정허용량이 과다치로 넘실거리는게 느껴진다. 이제서야 J에서 P로 돌아오나보다.

그치만 아직은 안된다. 일단 한숨 자고 일어나야 겠다.새벽에 도착하면 내게 가장 중요한 미션이 남아있다.


This is Soy Sauce Marinated Crab.

이건 간장게장이에요, Korean food 에요..

몇번을 되뇌이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이전 06화 [호찌민 한 달 살기]D-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