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충환 Jun 23. 2021

유령의 약물

버닝썬, 숨겨진 이야기 #8.

 * 약물 성폭행 피해자 입장에서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


 눈을 뜨는 순간, 내가 호텔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걸 알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자 옆자리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남자다.  


 ‘누구더라..?’


 아. 기억이 났다. 조금 전까지 같은 테이블에 있었던 그 남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갑자기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섰다. 서둘러 방문 밖으로 나가려 하자 남자는 오른손으로 내 목을 짓눌렀다.  


 ‘도망가야 한다!’


 순간 구역질이 밀려왔다. 호텔방 쓰레기통에다 한참을 토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엄청난 공포가 밀려왔다. 나는 그 남자의 다리를 붙잡고 외쳤다. 제발 보내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



 

 4시간 전,  친구들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그냥 놀러 간 클럽이었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즈음,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 한 태국인 남성이 다가왔다. 지인이 아는 사람이었다. 태국인 남자는 나에게 위스키 한 잔을 건넸다. 예의상 거절할 수 없었다. 알코올 도수 40도 위스키. 그러나 자신 있었다. 내 주량이 소주 4병인데.. 하지만 ‘왜 자꾸 술을 억지로 주지?’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두 잔 정도 마셨을까?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땐 호텔 방이었다.

 

 나는 성폭행 피해자가 된 것이다.


 분노와 참담한 마음을 부여잡고 곧바로 경찰서로 향했다.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했지만 경찰관은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날 밤 있었던 모든 과정이 내가 불리했다. 약물 성범죄 피해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약물 검사를 진행했지만, 내 몸에서 약물은 검출되지 않았다. 억울함에 산부인과 전문의 소견서까지 제출했다. ‘외음부 열상’. 대표적인 성폭행 피해 증거 중 하나다.


 ‘나는 분명 피해를 당했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분명 나는 '피해자'인데, ‘가해’를 증명할 수가 없었다. 경찰은 끝내 믿어주질 않았다.    

 결국 나를 성폭행한 그 태국인 남자는 본국으로 도망가 버렸고, 수사는 기소 중지 1)가 돼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바보가 된 것 같다.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세상에 내편은 없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버닝썬 사건이 터진 뒤, 같은 시기 그곳에서 벌어졌던 나의 이야기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 방송사 문을 두드렸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기자. 과연 내 말을 믿어 줄까?'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이 도저히 진정되질 않는다. 그때의 악몽 같은 기억이 하나하나 되살아났다. 두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져 나왔다.




 클럽과 마약.


 우리는 언젠가부터 이 두 단어의 조합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클럽 내 마약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보도 이후 며칠 동안 포털의 검색어 순위가 버닝썬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김상교 씨 폭행뿐 아니라 경찰의 대응, 마약 의혹까지 버닝썬의 각종 이야기들이 들불처럼 번져 갔다. 그러는 가운데 MBC로 수많은 제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제보 가운데는 우리가 결코 지나 칠 수 없는 내용들이 있었다. 제보자는 클럽 성폭행 피해 여성들이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클럽에서 누군가 건네준 술을 마시고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다. 술 때문이 아니라면 약물 때문일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일명 ‘GHB (Gamma Hydroxy Butyrate) 2)’ 소위 ‘물뽕’이다. 이 약물은 다른 별명도 가지고 있다. 이름이 참 충격적이다. ‘데이트 강간 약물(date rape drug)’. 미국에서는 이 별명이 더 유명하다.  


 색깔도 없고, 냄새도 나질 않는다. 그러니 술에 타면, 죽었다 깨어나도 약을 탔는지 모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약물검사에도 전혀 검출되지 않는다.


 ‘유령의 약물’이다.



'물뽕'은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클럽 세계에 퍼져있다 (출처:영화 '아저씨')

  



 어느 날 또 다른 제보가 들어왔다. 피해자가 당한 일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역시 약물 성범죄를 강하게 의심했다.




 새벽 3시.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녀는 컴컴한 거리를 내달리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두발에는 신발이 신겨져 있지 않았다. 맨발에 피가 흘렀지만 아픔보다 공포감이 더 컸다. 그녀에게는 아무런 통증 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두 눈이 풀린 채 무작정 불빛이 보이는 곳을 향해 뛰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휘청거리며 아스팔트 바닥에 고꾸라지길 여러 번.. 저 멀리 경비실이 보였다. 그녀는 첫 번째로 마주친 아저씨에게 매달려 다짜고짜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잠시 뒤 경찰이 도착했다. 그녀의 온몸에는 상처와 멍 투성이었다.    


 보드카 석 잔에 정신을 잃었고, 호텔방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겨우 정신 차린 호텔 방에는 클럽의 그 남자가 있었다. 그녀는 남자와 격투를 벌이다시피 저항하고는 호텔방에서 도망쳐 나왔다.


 다음날 곧바로 남자를 성폭행 혐의로 신고를 했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산부인과 전문의 소견도 경찰에 제출했다. 그런데 며칠 뒤, 경찰은 그녀에게 호텔 로비의 CCTV를 보여줬다. 그녀는 영상을 보는 순간 까무러칠 뻔했다. 그녀가 그 남자의 팔짱을 끼고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내가 아니다!’      


그러나 화면 속의 여자는 분명 그녀였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얼마 뒤 남성은 그녀를 ‘무고죄’로 역고소를 했다.


그녀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피해자가 자세히 묘사한 당시 상황을 재구성)




실제 거꾸로 무고로 고소를 당해 출석 통보를 받은 문자


 후배가 피해 여성을 만난 자리에는 여성의 아버지도 함께 나왔다. 아버지는 처음 보는 남성 취재 기자에게 온몸에 멍이 든 딸의 신체 사진을 보여줬다.

 세상 어느 아버지가 딸의 신체 사진을 처음 보는 남성에게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는 너무도 간절히 딸의 억울함을 풀고 싶어 했다. 매우 점잖아 보이는 그 아버지는 취재진에게 심지어 이렇게 까지 말했다.


 “물뽕을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데.. 나도 구할 수 있어요! 필요하면 내가 구해보겠어요! 증명해 보이겠어요!”  


 아버지는 불법인 줄 알면서도 딸이 범죄에 이용당한 물뽕을 구해 보이겠다며, 세상을 향해 분통함을 포효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국가기관은 피해자들의 편이 결코 아니었다.


 소위 ‘물뽕’ 피해자는 ‘꽃뱀’의 멍에를 쓰고 주변으로부터 2차, 3차 가해까지 받는다. 심지어 수사 과정에서 2차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클럽에는 왜 가셨어요?”라는 질문과 ‘그런 일을 당할 줄 알면서 간 것 아니냐’는 조롱은 피해자들을 두 번 절망케 했다.

 수사기관은 대부분의 사건을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사건을 종결짓고 만다. 그러고 나면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무고죄로 역고소를 당한다. 그로 인해 피해자 가족들은 엄청난 시간과 돈이 드는 법적 소송전에 시달리고, 삶은 갈수록 피폐해져 갈 수밖에 없다.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클럽에 놀러 갔다가 당했기 때문이었다.

 흔적이 남지 않는 ‘유령의 약물’로 당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이 만난 피해자들은 긴 시간의 싸움으로 인해 지쳐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움츠러들지 않고 스스로의 피해사실에 대한 명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물뽕' 성범죄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법과 사회는 아무것도 개선되지도, 바뀌지도 않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유령의 실체’를 밝히기로 마음을 먹었다. 피해 여성들이 주장했던 모든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모하고도 위험한 도전을 하기로 했다.


 이것은 세상을 바꾸기 위한 저널리스트들의 ‘실험과 도전’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은 버닝썬 게이트를 닫는 마지막 이야기가 될 것이다.



1) 범죄의 객관적 혐의가 충분하더라도 피의자나 참고인의 소재불명 등으로 수사를 더 이상 이어갈 수가 없어 종결할 수밖에 없는 경우 검사가 일시적으로 수사 중지를 결정할 수 있다.


2) 향정신성의약품 종류다. 주로 수면이나 진정 작용을 해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의해 관리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