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폭탄을 품은 치타

by 보라구름

좌절감과 공포. 병원을 재방문할 때의 심정이다. 호전된 줄 알았는데 착각인 건가? 영영 계속 이렇게 도돌이표 안을 돌면서 살아가야 하나? 이런 질문에 맥없이 무너진다. 그럼에도 가지 않고서는 도리가 없어 나를 어쩌면 좋을지 몰라 쩔쩔매다가 한동안 가지 않았던 정신건강의학과에 급히 예약을 잡고 방문했다.


불안감이 심해졌다고 이야기를 꺼내며 상담을 시작했다. 불안을 가져오는 대상은 머릿속에 시한폭탄으로 그려졌다. 다만 내 불안의 시한폭탄은 그렇게 단순하거나 친절하게 설계된 일반 시한폭탄이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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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 시간 예정을 알려주는 시계의 분, 초는 수시로 랜덤의 방식으로 바뀐다. 곧 터질 것처럼 몇 분이나 몇 초 앞으로 바짝 다가와 이제 모든 게 끝날 거라는 절망과 곧 다 끝난다는 안도를 동시에 주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먼 미래의 시간을 표시하고 있을 때도 있다. 폭탄을 건드려 해체하려 애써봐도 그런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폭파 예정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간다.


언제 터질지도 모르고, 폭탄을 없앨 수도 없고, 폭탄 앞에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도 없는 인생이라니 너무 불행하지 않은가.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애당초 폭탄을 설계한 것이 나 자신이고, 폭탄을 없앨 수 있는 것도 나 자신이라는 점.


선생님은 이렇게 불안을 이미지화를 하면 오히려 그 이미지에 갇혀서 더 나오기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 이미지화하지 않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미 폭탄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버린 걸 어쩐담.


뭔가를 항상 열심히 시작하고(일을 벌이고),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여유를 만끽하는 게 불가능한 성격의 나, 열심히 몰두하는 뭔가가 없으면 불안해하고 스스로 다양하게 벌려 놓은 일 마무리가 안 되어 힘들어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나를 보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님은 치타예요. 빨리 뛰어서 사냥을 하는 육식동물이죠. 그런데 초원을 느리게 거닐며 풀을 뜯는 초식동물을 보면서 나도 저런 여유를 갖고 싶다고 하시는 것과 같아요. 순간 스피드가 빠른 단거리 질주에 능한 치타에게 마라톤을 뛰라고 요구하고, 그걸 못한다고 질책하는 것과도 같고요. 치타는 에너지를 집중해서 한 번에 쏟아부어 사냥을 하기 때문에 사냥을 안 할 때는 쉬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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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야기를 들은 것이 아님에도, 그새 불안에 잠식당해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오르니 짜증과 불안으로 찌푸렸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그래, 난 치타다. 시한폭탄을 품은 치타. 언젠가는 폭탄 해체에 성공할 날이 오리라 믿으며 단거리 질주와 사냥, 긴 휴식에 익숙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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