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된 무기력

by 보라구름

지난주부터 다시 일주일에 한 번 정신건강의학과에 상담과 약 처방을 받기 위해 가고 있다. 이제 꽤 좋아진 것 같다는 건 다 착각이었나? 아니면 아주 잠깐 맛 본 달콤한 평화였나. 모르겠다. 와르르 무너지고 만 게 언제부터였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정말 잘 모르겠다.


어제의 나는 이 지겨운 도돌이표(힘들다 - 괜찮다 - 나아진다 - 정말 괜찮다 - 망했다)의 반복에 진절머리가 난다고 말했다. 약을 먹지 않은 아침이 가장 끔찍하다고. 나를 돌보려고 무던히 애를 써왔고, 운동도 해봤고, 그림일기도 그렸고, 글도 썼고, 식단 일기도 썼고, 책도 열심히 읽었고... 그렇게 무엇 무엇 참 아등바등 열심히 발버둥 쳤다. 그건 누구보다 의사가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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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불안과 더불어 온몸을 휘감아버리는 무기력감 때문에 침대 밖으로 발 하나 내려놓는 것이 마치 어마어마한 무게의 배낭을 메고 순례길을 오르는 것처럼 비장하고도 힘겹다. 나아져봤자 어차피 다시 제자리야. 신기루를 보고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줄 알고 허둥지둥 달려갔는데 그냥 모래 벌판인 게 반복되는 것 같다.


양진이라는 피부질환도 낫지 않고 재발하는 게 반복되고 있어서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던 술 마시기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맥주 한 캔만 마셔도 환부가 가렵고(정말 미치도록 가려워서 살을 쥐어뜯게 만든다), 특히 밤에 가려움이 심해져서 불면을 초래한다.


그나마, 정신적으로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책을 읽을 때.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고,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날 때 정도라서 미친 듯이 책을 주문해서 들여놓고 있다. 활자를 훑고 게걸스럽게 탐하듯 책의 물성을 매만지면서 위안을 삼는다.


처방받아온 약을 먹고 나니 간신히 아침의 그 지옥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약이 없으면 공포 속에 내던져질 거라는 공포심이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지만, 일단 약을 집어삼키며 공포로부터 달아나고 있다.


학습된 무기력, 너무 많이 들어서 뻔한 말인데 정말 내 안에서 학습된 무기력이 발동하는 걸 느낄 때마다 끔찍한 절망 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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