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집어삼킨 기억

초자아의 지배

by 보라구름

어차피 휴직 중인데 연휴 기간이 무슨 상관이야? 싶다가도..


아직 휴직에 적응이 안 돼서 그런 건지, 아니면 휴직과 연휴가 무관한 건지

여하튼 연휴는 연휴느낌이다.


나란 사람은 연휴, 휴가, 주말에 특히 정신적으로 취약하다.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면 그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해 마음이 급해진다. 잡다한 집안일, 외출(쇼핑 또는 카페, 맛집), 영화나 시리즈 보기, 책 읽기, 글 쓰기, 고양이들 케어, 산책, 약속, 게임.. 이런 것들 중 반드시 해야 할 것을 하고, 그다음에 하고 싶은 것들 중 꼭 하고 싶은 걸 하고, 이렇게 머릿속에서 리스트를 정렬한다. 그러면서 다른 할 것들을 또 떠올리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과하게 의욕이 앞설 경우 하루에 너무 많은 일을 하는데 뿌듯하게 한다기보다는 해치우듯이 해낸다. 그러고 나면 다음날은 방전되어 뻗거나 탈이 난다.


쉬는 날 쉴 수 없는 나란 사람의 고충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안다. 그래서 연휴인 오늘 아침 7시부터 일어나서 책상 앞에 앉아서 여기저기에 글을 쓰고 올리고 있다.


지금 글을 적다가 알았다. 아, 나 아침 약을 안 먹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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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불안 때문에 하루에 3번? 4번 약을 먹었기에 오늘은 좀 줄여보려고 했는데 그 결과는 별로 좋지 못한 것 같다.


약 먹으러 잠시 주방에 다녀왔는데.. 웬걸? 찢어진 약 비닐이 있네? 아까 내가 약을 먹었나?

낭패다.. 기억이 안 난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어쩔 줄 모르겠는 반응이 안 나오는 걸 보면 확실히 약을 먹은 것 같긴 하다.


솔직히 어제도 그랬다. 2번 먹었는지 3번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거 심각한 건가?


앞으로는 약을 먹을 때마다 기록해야겠다. 불안이 기억을 집어삼킨 것이기를. 그게 아니라면 내 기억력에 무슨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건강염려증까지 도지려고 하니 큰일이로군.


상태는 이런데 이미 여행을 예약해 뒀다. 체력적으로 여행을 갈 상태라고는 할 수 없어서 일단 기간은 좀 넉넉하게 뒤로 해놨는데 휴직하고 나서 맘 편하게 평일에 여행 가는 걸 꼭 해보고 싶었는데 아직 시도조차 해보지 않아서 마음이 급해졌다. 벌써 아침저녁은 꽤 선선한데 10월 넘어가면 11월, 그때는 또 쌀쌀할 것 같아 이 좋은 계절인 10월 여행을 놓치고 싶지 않아 졌다.


불안정하고, 우울한 이 감정을 안고 살아간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힘들구나 새삼 느낀다. 이런 나를 데리고 앞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최근 며칠은 내내 자신이 없다. 휴직 후 복직해서 일할 자신도 없고, 퇴사해서 다른 일을 시작할 자신도 없고, 뭘 떠올려도 그저 막막하고 무기력하다.


이런 건 사실 예견된 일이었다. 연휴나 주말에 쉴 때도 불안 때문에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내가 휴직기간 동안 제대로 쉴 수 있을지 스스로 의문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제대로 불안에 쫓기는 나를 보니 내 이럴 줄 알았지.. 하며 혀를 차는 소리가 저 안에서 들려온다. 여전히 거대한 나의 지배자, 초자아의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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